유네스코 남한산성
고산자 김정호가 편찬하고 간행한 대동여지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듯이 우리나라는 성곽의 나라였습니다.
(자막: 대동여지도 보물 제850-1호, 서울대학교 규장각. 1861년 김정호가 편찬·간행하고 1864년에 재간한 전국 지도첩)
외침이 많았다는 이야기죠. 국토의 70% 이상이 산으로 이루어져 있어가지고 고대로부터 산성을 거점으로 국가 방어 체계를 운영해 왔던 것입니다.
(자막: 고대로부터 산성을 거점으로 국가방어체계 운영)
그 수많은 산성들 중에서 남한산성이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 유산으로 등재된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자막: 유네스코 세계유산 남한산성)
역사를 지킨 요새 세계유산 [남한산성]
만주에서 발기한 신흥강국 청이 일으킨 침략전쟁 병자호란.
(자막: 병자호란 만주에서 발기한 신흥강국 청이 일으킨 침략전쟁)
이 겸재 정선의 송파진이라는 그림은 병자호란의 역사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자막: 송파진 겸재 정선(경교명습첩中))
상단 능선에 묘사된 소나무 숲과 성곽이 바로 남한산성이고요. 우측 중간에 보이는 정각이 삼전도비입니다.
(자막: 남한산성, 삼전도비)
병자호란 당시 조선은 남한산성을 거점으로 죽음을 각오하고 항전했지만 결국 성문을 열고 삼전도로 내려와 항복했습니다.
(자막: 남한산성을 거점으로 죽음을 각오하고 벌인 항전, 삼전도로 내려와 항복)
항전과 항복의 역사를 동시에 떠올리게 하는 이 남한산성이 2014년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유산으로 등재됩니다.
(자막: 남한산성 유네스코 지정 세계유산으로 등재(2014년))
남한산성은요 험준한 산세를 이용한 산성 요새입니다.
(자막: 남한산성 험준한 산세를 이용한 산성 요새)
서울에서 남동쪽으로 25km 떨어진 산지 그리고 평균 고도 해발 480m 이상의 험준한 산세를 이용해 방어력을 극대화한 남한산성에는
(자막: 서울에서 남동쪽으로 25km 떨어진 산지, 해발 480m 이상의 험준한 산세를 이용해 방어력 극대화)
일본과 중국으로부터 전파된 방어 기술이 집약되어 있습니다.
(자막: 서구의 화기 공격을 막기 위한 방어기술이 일본과 중국으로부터 전파됨)
성문 밖으로 한 겹 더 성벽을 쌓아 성문을 이중으로 지키는 시설물인 옹성,
(자막: 옹성, 성문에 접근한 적을 포위·공격하기 위해 성문 밖에 한 겹 더 성벽을 쌓은 이중 방어물)
또 총알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 낮게 쌓은 담장인 여장,
(자막: 여장, 총알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 낮게 쌓은 담장)
중화기 공격을 위해 성곽에 구멍을 낸 포루,
(자막: 포루, 중화기 공격을 위해 성곽에 낸 구멍)
시대별 축성법으로 견고하게 쌓아올린 성벽. 이런 걸 살펴보면 남한산성이 진짜 천혜의 산성 요새구나라는 사실을 그냥 눈으로 봐도 알게 됩니다.
(자막: 각 시대의 축성법이 반영되어 치열한 열정과 기술로 축조된 성벽)
또 남한산성은 죽음을 각오한 항전 의지로 싸울 수 있도록 임시 수도의 기능을 갖추고 있습니다.
(자막: 남한산성, 임시 수도 기능을 갖춘 산성)
병자호란 당시 임시 궁궐로 사용된 남한산성 행궁을 보면요,
(자막: 병자호란 당시 임시 궁궐로 사용된 남한산성 행궁)
궁궐 침전의 법도를 그대로 적용한 내행전을 볼 수 있고요. 정당이라 부르는 이 외행전을 비롯해서 종묘 사직을 보존하기 위해 건립했던 좌전과 우실까지.
(자막: 내행전, 외행전, 좌전과 우실)
정말 이 죽음을 각오한 항전 속에서 임시 수도의 기능을 담당했던 역사의 무게감이 고스란히 느껴지게 됩니다.
이후에 남한산성은요, 의병 활동과 독립투쟁의 중심지로 거듭나면서 독립성과 자주성의 상징으로 또 자리매김하죠.
(자막: 의병 활동과 독립투쟁의 중심지, 우리의 독립성과 자주성의 상징)
남한산성, 더 이상 아픈 역사가 아닌 자랑스러운 우리의 문화유산입니다.
(자막: 외세의 침략에 맞서 항전했던 역사의 치열함이 담긴 문화유산)
한국의 유네스코 등재유산 세계유산 남한산성 World Heritage_Namhansanseong
KCISA 한국문화정보원
남한산성은 극동아시아 여러 지역의 영향을 바탕으로 다양한 군사 방어 기술을 종합적으로 구현하고 있는 조선왕조의 비상시 임시 수도로서, 한국의 독립성 및 한국 역사상 다양한 종교·철학이 조화롭게 공존해온 가치를 상징하는 유산이다.
동 유산은 본성(한봉성과 봉함성을 포함)과 신남성(동서돈대)으로 구성된 연속유산으로 16세기에서 18세기에 이르는 기간 동안 동아시아 국가들 간 축성술과 도시 계획이 상호 교류한 증거이다.
또한 7세기부터 19세기까지 축성술의 시대별 발달 단계와 무기 체계의 변화상을 잘 보여주며 지금까지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는 살아있는 유산으로서 가치를 보유한다.
남한산성은 서울의 중심부에서 동남쪽으로 25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으며, 지형적으로 평균 고도 해발 480m 이상의 험준한 산세를 이용하여 방어력을 극대화한 곳이다. 남한산성은 둘레 12km에 이르며 중심 도시가 입지할 수 있을 만큼 넓은 분지이기 때문에 백성과 함께 왕조가 대피할 수 있는 조선 왕실의 보장처였다.
남한산성은 7세기 초에 처음 만들어져 여러 차례 재건되었으며, 특히 17세기 청의 공격에 대비해 크게 중건된 바 있다. 남한산성은 중국과 일본의 영향을 수용하면서 서양식 무기 도입에 따른 성곽축조 기술의 변화를 종합한 군사 방어기술의 개념을 집대성하고 있다.
조선은 임진왜란(1592~1598)과 연이은 청과의 전쟁(1672~1673)등을 겪으며 일본의 아주치-모모야마 시대, 중국의 명나라, 청나라 시대와 광범위하게 상호 교류를 하게 되었다.
그 결과 새로운 화포와 무기에 효과적으로 대항하고 장기전을 수행할 수 있도록 산성을 지속적으로 증·개축을 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남한산성은 16세기에서 18세기에 이르는 기간 동안 동아시아 국가들 간 축성술과 도시 계획술을 종합적으로 구현하게 되었다.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인정받은 남한산성의 가치는 다음과 같다.
첫째, 남한산성은 16세기와 18세에 이르는 기간 동안 동아시아의 한국과 중국 일본 간에 산성 건축술이 상호 교류한 중요한 증거이다. 남한산성은 국제 전쟁을 통해 동아시아 무기 발달과 축성술이 상호 교류한 탁월한 증거로, 조선의 자주권과 독립성을 수호하기 위해 유사시의 임시수도로서 기능할 수 있도록 계획적으로 축조된 유일한 산성 도시이다.
둘째, 남한산성은 7세기부터 19세기까지 축성술의 시대별 발달 단계와 무기 체계의 변화상을 잘 보여준다. 남한산성은 험한 지형을 활용하여 성곽과 방어시설을 구축함으로써 7세기부터 19세기에 이르는 축성술의 시대별 발달단계를 잘 나타내고 있다.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에 위치한 남한산성은 사적 제5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국가지정 문화재 2개(성곽, 남한산성 행궁), 경기도 지정문화재 6건(수어장대, 연무관, 숭렬전, 청량당, 현절사, 침괘정) 및 경기도 기념물 2건(망월사지, 개원사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총 면적은 36,447㎢로 성 안쪽이 2,317㎢(6%), 성 바깥쪽이 34,130㎢(94%)를 차지한다.
문화유산적 가치
등재 기준: 세계문화유산 기준 (Ⅱ), (Ⅵ)
- (Ⅱ)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가 돼야 한다.
- (Ⅵ)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