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공연

Kim, Duck Yong
- 분야
- 전시
- 기간
- 2025.03.13.~2025.05.20.
- 시간
- -
- 장소
- 부산 | 소울아트스페이스
- 요금
- 무료
- 문의
- 051-731-5878
- 바로가기
- http://www.soulartspace.com/?page_id=220&vid=4
전시소개
전시서문
<김덕용, 뿌리의식과 별의 동경>
서 성 록 (안동대 미술학과 명예교수)
이주의 삶은 먼 나라에서만 체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래 정주해온 곳을 벗어나는 순 간부터 이주의 삶이 전개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어디서 왔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 하게 된다. 그런 질문을 우리는 김덕용의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시골에서 자라난 김덕용 은 서울로 상경한 뒤 문화적 차이를 겪게 되면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고 이 것을 작품주제로 삼게 되었다. 벌써 오래전의 일이긴 하나 그가 접한 대도시는 이전의 문화적 환경과는 매우 대조적인 것이었다. 작가는 이 고민을 작품 안으로 가져왔다.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은 무엇을 만나든 그냥 스쳐지나가는 법이 없다.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에서 평범하지만 소중한 것을 발견한다. 유년시절 경험한 이야기와 추억이 자주 등장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것들이야말로 김덕용의 독특한 작품세계를 탄생시킨 요인이 되고 있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실내에서 바깥을 내다보는 작품들이다. 바깥에는 시원한 바다가 펼쳐 지는데 이것은 한국의 정원문화에서 독특한 특징으로 지적되는 ‘차경’이기도 하다. 작가는 그 를 키워준 문화적 뿌리에 대해 고민하다가 생활공간 속에서 그 답을 찾게 되었다.
작품은 안에서 바깥을 내다보는 시점으로 되어있다. 따라서 하나의 화면에 두 장면이 펼쳐 지는데 방안은 전통가옥처럼 나무기둥, 창문, 서안, 과반, 바닥 등으로 되어있다. 종래에는 실 내에 달 항아리나 주병, 꽃무늬 이불이나 베개 등도 볼 수 있었으나 근작에서는 장식적인 이 미지들은 제하고 단순하게 구도를 설정함으로써 기하학적 배열이 주는 단순함과 사색적 성격 을 강조하는 편이다. 여기서 주목한 것은 그 이미지들이 실제 나무라는 사실이다. 약간 채도 차이는 있지만 나무의 결이 살아있고 색감도 그대로이다. 어떤 재료의 성질도 훼손하지 않고 나무 자체의 물성을 살려내려는 의도를 엿볼 수 있다. 가릴 것도 치장할 것도 없는 담담한 실 내 정경을 작업의 바탕으로 잡고 이를 발전시켜가는 셈이다.
작가는 실내공간에 추가로 바깥의 풍경, 즉 드넓은 바다풍경을 끌어들인다. 그것은 실제의 이미지라기보다는 상상에 의한 연출의 성격이 짙다. 그가 제시하는 바다는 더없이 찬란하고 고요하다. 실제의 바다에서 느낄 수 있는 싱그러움을 자랑한다. 여기서도 그의 한국미에 대한 애정을 느껴볼 수 있는데 바다의 이미지를 구성하는 요소는 놀랍게도 수많은 자개 조각들이 다. 바다를 표현할 때 안료를 사용할 수도 있었을 텐데 굳이 자개를 사용한 것은 그의 전통적 인 것의 관심에 기인한다. 선인들의 전통 문화를 현대적으로 계승하려는 뜻있는 시도이다. 도 공이 물레 앞에 앉아 흙을 만지듯이 그는 지지체 앞에 앉아 반짝이는 자개를 붙여간다. 정확 도를 요하는 작업이고 바다를 완성시키려면 수천 개의 자개를 차근차근 붙여가는 지난한 과정 을 밟아야 한다. 그 결과 옥빛과 푸른빛, 분홍빛이 감도는 한 점의 바다산수를 탄생시켜내는 것이다.
작가는 왜 이런 힘든 과정을 마다하지 않는 걸까? 그것은 ‘근원에 대한 동경’에 기인한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나무와 자개가 지닌 물성적 현상만이 아니다. 그것에 내재된 고유한 근 원에 대한 그리움, 이것은 비롯된 곳과 머무는 곳이 다른 존재로 현시대를 살아가는 나에게 삶에 대한 본질적 물음으로 다가와 동질적인 귀소로 물아일체 된다.”(작가노트)
그가 말하는 귀소는 고향일수도, 시원적 공간일 수도 있을 것이다. 떠나온 것의 그리움이 그의 작업을 휘젓는다. 바다를 차용하는 이유도 따지고 보면 그것이 어머니의 품처럼 여겨졌 기 때문일 것이다. 가슴을 채우고 마음을 평온하게 해주는 편안한 호흡을 제공하는 바다. 태 어나기 전부터 우리는 어머니 자궁에서 이런 편안한 호흡을 해왔다. 자개가 내뿜는 반짝임, 즉 윤슬의 손짓은 옛 시절을 갈망하게 만드는 매개 역할을 한다. 그의 작업에서 바다는 실내 안에 머물고 이 ‘머무는 곳’은 ‘비롯된 곳’과 다르기 때문에 ‘비롯된 곳’의 향수를 자극하는 의 미를 갖는다. 이처럼 그의 작업은 과거와 현재를 잇는 다리역할을 한다. 분명 과거는 소급할 수 없는 영역의 시간대에 속하지만 예술작품 속에서 얼마든지 그것을 느낄 수 있으며 과거의 기억이 지속되기에 현재의 나를 만들고 있다는 점을 잊지 않는다.
이제 그의 시선은 미래로 향한다. <우주산수>와 <별유천지>는 캄캄한 밤하늘 속에서도 무 언가 흐릿한 형태가 보인다. 시선을 화면 가까이에 가져가면 음영으로 처리된 산과 골짜기가 배치되어 있는데 안견의 ‘몽유도원도’와 정선의 ‘금강전도’를 참고했다고 한다. 하늘에 산수가 부유하고 있으니 실경보다는 의경에 가까운 그림이다. 여기서는 조형성보다는 구상력과 상상 력이 큰 역할을 수행한다.
온통 어둠에 휩싸여 있는 화면에서 우리는 어떤 이미지와 조우하게 된다. 무수한 자개들이 어떤 것은 어둠 속에 묻혀 있기도 하고 어떤 것은 살짝 고개를 내밀기도 하고 어떤 것은 어둠 을 밝히는 존재로 자리하고 있다. 작가는 이를 ‘생명의 별’이라고 부른다. “흐르는 시간 속 기 억되는 사물과 현재, 그리고 미래의 변화될 물질들이 보이지 않는 하나의 실체를 가지고 나의 공간에서 유기적으로 공존한다.”(작가노트) 우주산수는 앞으로 맞이할 미래의 삶에 대해 진술 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는다. 바다산수가 근원에 대한 동경을 표현한 것이라면 우주산수는 돌 아갈 세계에 대한 설렘의 표시이다. 그가 죽음을 의미하는 잿가루를 밑바탕에 광범위하게 도 포(塗布)한 것도 돌아갈 세계에 대한 암시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무거운 침묵이 흐른다고 해서 종말을 연상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죽음은 결국 ‘생명의 별’로 조금 더 다가감을 의미하 기 때문이다.
‘생명의 별’이 반짝이는 미지의 우주는 한편으로는 기대와 설렘을 키우는 곳이기도 하다. 그것은 현실에서 두려움의 경험에 이력이 난 우리로서는 쉽지 않은 감정이다. 진정한 아름다 움이 삶의 모습을 포용하는 데 있다면 그것은 팔팔한 젊음뿐만 아니라 주름살이 핀 노년까지 아우르는 것을 의미한다. 삶의 열망, 사랑과 좌절, 성공과 실패, 감사와 희열 등을 겪으며 끝 내 죽음에 이르지만 그것이 마지막, 곧 두려움의 대상만은 아니다.
주위가 온통 어둠으로 뒤덮인, 영롱한 별무리가 박힌 우주산수를 보자. 그가 우주에 촘촘히 별을 새겨놓은 뜻은 무엇일까? 언뜻 보아선 어둠에 가려서 별이 눈에 띄지 않는다. 눈을 크게 뜨고 보아야 별빛의 존재가 들어온다. 그것의 침묵때문에 동요하고 삶이 빨리 사라지는 안개 와 같이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나보다. 요점은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없다는 데에 있다. 보 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삶의 주기, 즉 현실을 받아들이고 주어진 것들을 가치 있게 받아들이 고 돌보는가 하는 점이다. 그런 면에서 별빛이 지닌 의미의 무게가 크다. 그의 그림에서 별빛 은 희망이요 설렘이요 미래의 은유이다. 별빛 없는 우주, 희망 없는 삶은 상상하는 것만으로 도 비극적이다.
때로는 저 멀리의 별이 너무 멀다고 느껴질 수도 있다. 존 키츠(John Keats)는 이런 시를 들려주었다. “봄의 노래는 어디에 있을까? 봄의 노래는 생각하지 말라. 너에게는 너의 노래가 있나니”(‘가을에게’) 키츠가 말한 ‘너의 노래’를 우리는 김덕용의 ‘당신의 별’로 바꾸어볼 수 있지 않을까. 키츠의 시처럼 먼 곳의 별이 아니라 가까이에 있는 별을 발견할 때 우리의 존재 감이나 현실 의식은 한층 강렬해진다. 현재에 충실히 존재하고 그것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고 초조해하지 않으면서 지금을 만끽하는 것, 김덕용은 이 점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