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妙: nuance

美妙: nuance

분야
전시
기간
2024.06.22.~2024.07.20.
시간
월~토 10:00 - 18:00
장소
서울 | 예화랑
요금
무료
문의
02-542-5543
바로가기
https://www.galleryyeh.com/

전시소개

화가 박현주, 윤종주 그리고 조각가 이환권의 ‘미묘’ 삼인전이 열린다.


인간이 사물을 판단하고 느끼는 데에는 인식의 영역과 지각의 영역이 있다. 이 둘은 연결되면서도 독립적이다, 일상적인 삶에서는 대체로 인식과 지각이 일치하는 편이다. 가끔 인식과 지각이 살짝 일치하지 않는 상태가 발생할 때가 있다. 지각이 포착한 사물이나 사태를 인식이 잡아주지 못하고 미끄러지는 상태, 그리하여 필경 애초의 지각에 대한 신뢰에 약간의 흔들림이 일어나거나 틈이 벌어지는 경우, 이를 우리는 ‘미묘’라 한다. 미묘는 우리를 새롭고 낯선 미적 경험으로 이끈다.


박현주는 빛에 매진해온 작가다. 오랫동안 금박작업을 응용한 페인팅을 해왔다. 오늘날처럼 화이트 큐브로 대표되는 밝고 환한 전시공간의 미술작품과는 달리, 빛이 귀했던 시절의 공간, 예컨대 조명이 거의 없는 고대 건물의 어두컴컴한 공간에서 감상해야만 하는 미술작품은 빛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반사시킬 수 있어야만 했다. 방과 방 사이의 칸막이인 맹장지에 그려진 그림, 이른바 후스마에가 대표적이다. 이때 사용되는 재료로 금박 또는 은박이 동원된다.


물론 박현주의 금박작업은 단순히 빛의 효율적인 반사에 방점을 둔 것은 아니었다. 금박에 반사된 빛은 모노크롬의 단일파장을 지닌다. 세상의 온갖 다양한 파장의 빛이 하나의 파장으로 환원되어 반사된다. 도상 또한 기하학적인 형태로 환원적인 형태를 띠면서 박현주의 작품세계 전체가 환원적인 프로세스를 강조했다. 금박을 통한 환원주의의 완성, 이게 박현주의 미학이었을 게다.


최근 박현주는 색채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색채에 동원되는 물감은 그 자체로 물성을 지닌다. 박현주가 즐겨 사용하는 안료는 제품으로 나오는 물감보다 물성이 훨씬 더 강하다. 곱게 갈아진 안료의 결정 하나하나가 각기 서로 다른 각도와 파장으로 굴절된 빛을 반사한다. 반사된 빛들은 서로 간섭하면서 매우 다양하고 화려한 빛깔의 집합을 이룬다. 그 빛깔들은 확연하게 색상이 서로 구별되는 폴리크롬의 집합을 이루기도 하고 비슷한 색상끼리 모여서 폴리크롬의 계열화를 이루면서 모노크롬에 가깝게 보이기도 한다.


폴리크롬의 색층은 겹겹이 올라가면서 화면은 점점 더 밝아진다. 캔버스의 바탕엔 검정에 가까운 어두운 색상을 배치했다. 금박작업에서는 어둠이 캔버스의 최상층 금박의 표면 위와 방 안에 존재하고 있었다면 최근의 작업에서는 어둠이 캔버스의 색층 맨바닥에 숨겨져 있는 셈이다. 어둠을 섞은 밝은 빛, 밝은 빛을 품은 어둠의 공간, 박현주의 ‘미묘’함이 여기에 있다.


윤종주의 작품에서 주안점은 색면과 색면의 가장자리에 있는 색띠다. 색면은 균질성을 유지하기 위해 매우 섬세한 작업 프로세스를 거쳤다. 그 과정이 너무나 엄격하고 결과 또한 섬세하여 색면은 편평하게 무한대 공간으로 뻗어나갈 듯한 기세다. 무한으로 뻗어나갈 수 있는 색면이란 기하학적인 개념 위에서만 존재가능한 평면뿐이다. 바닥에 편평하게 놓여진 캔버스 위에 아크릴릭 물감의 층이 한 켜씩 쌓일 때마다 물감이 캔버스의 가장자리 모서리를 지나 흘러내리는 데 이를 닦아주는 과정에서 더 밝은 빛깔의 색띠가 형성된다.

색면의 가장자리에 밝은 색띠가 등장하면서 무한을 향했던 색면의 평면은 깊이를 가진 표면으로 가두어진다. 평면이 표면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표면은 덩어리의 일부를 이루는 한 층이다. 실재하는 모든 것은 크든 작든 덩어리를 가진다. 색띠 테두리는 평면이란 개념을 표면이란 실재로 바꾸어주는 역할을 한다. 필경 윤종주의 평면작업은 표면을 거쳐 색채를 가진 얇은 오브제라는 느낌으로 이어진다.


평면과 표면을 구별짓게 하는 것은 중력의 작용 여부다. 중력에 독립적이면 평면이 되고 중력에 종속적이면 표면이 된다. 평면이 공간의 공백성(blankness) 혹은 균질공간에 속한다면 표면은 공간의 적재성(loadedness) 혹은 장소 그 자체에 속한다고 할 수가 있다. 윤종주의 작품에서 가장자리 모서리의 밝은 색띠는 평면에서 표면으로, 공백에서 적재로, 공간에서 장소로 미끄러지는 ‘미묘’한 지점으로 불러야 할 것이다.


이환권의 조각에는 회화를 방불케 하는 요소들이 많이 숨어 있다. 고전적인 회화에는 관람자의 두 눈과 작품, 그리고 작품 뒤 무한대 거리에 놓인 소실점을 잇는 하나의 직선, 이른바 단일시점이 성립한다. 이와는 달리 조각은 여러 각도에서 작품을 볼 수 있는 다시점이 허용된다.


이환권의 조각은 극단적으로 납작하게 짜부라져 있다. 그의 작업은 입체에서 평면으로 변환해 가는 중간쯤에 놓여있다. 이환권의 작품 앞에 선 감상자의 눈, 혹은 신체가 좌우로 시점을 달리하며 변화할 때 신체의 감각이 예상하는 작품의 각도 변화에 비해 실제로 작품에서 지각되는 각도의 변화가 훨씬 더 급격하다.


그 급격함은 일반적인 조각에 비해 다시점의 운용 범위를 매우 제한적으로 묶어둔다. 시점이 제한적일수록 조각은 점점 회화에 가까워진다. 어떤 작품(이 경우 짜부라지지 않은 조각들도 있다)에는 회화에서나 다루는 그림자를 조각의 영역으로 끌어들인 것도 있다.


신체가 습관적으로 예상하는 감각은 인식에 가깝다. 아는 것을 본다, 혹은 아는 것이 보는 것이다(Believing is seeing 메리 앤 스타니스제프스키)라 함은 인식이 지각을 지배한다는 주장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이환권의 짜부라진 작품 앞에서 이 주장은 무력해진다. 아는 것(인식)과 보는 것(지각)을 더 이상 지배하지 못하고 이 둘 사이에 균열이 발생한다. 그 균열 속에서 ‘미묘’함이 부풀어 오른다. 그 균열이 너무나 심대하기에 그의 조각은 ‘미묘’를 넘어 돌발적이거나 마술적이기까지 하다.


대개의 조각은 매스 혹은 공간을 추구한다. 이환권 조각의 돌발성은 매스도 공간도 아닌 사건성에 더 가깝다. 곧게 뻗어가는 시간의 흐름에 급격하게 변화하는 지각의 각도를 부여한다. 그리고 마술적인 사건성을 부른다. 그의 조각은 상습적인 인식의 단단함을 무력화시킨 다음 낯선 지각의 세계로 우리를 이끌고 있다. 어색하나 재미있는 지각의 세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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