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 최후의 날

명성황후 최후의 날

저/역자
김영수
출판사
말글빛냄
출판일
2014.05.08.
총페이지
271쪽
추천자
김문식(단국대 사학과 교수)

도서안내

청일전쟁 직전에 일본 군대가 무력으로 경복궁을 점령했다. 이때부터 고종은 일본의 감시를 받으며 살아야 했고, 일본인의 움직임을 살피려고 경복궁에 외국인을 상주시켰다. 경복궁에는 항상 두 명의 외국인이 체류했고 그 중에는 러시아인 사바찐도 있었다. 그는 독립문, 손탁호텔, 러시아공사관, 덕수궁의 정관헌과 중명전을 설계한 건축사였다. 사바찐은 1주일에 4일씩 저녁에 향원정 오른쪽에 있던 위병소로 출근했다가 다음날 아침에 퇴근하는 생활을 계속했다. 이 책은 사바찐의 기록을 바탕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던 현장을 시간대별로 재현했다. 1895년 4월 삼국간섭으로 일본이 위축되자 고종과 명성황후는 일본을 멀리하고 러시아를 가까이하는 외교정책을 폈다. 일본은 이런 명성황후를 제거하고 대원군을 내세우며 김홍집에게 친일 정부를 조직하게 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10월 7일 오전에 일본 공사 미우라에게 훈련대를 해산시킨다는 왕실의 명령이 전달되었다. 미우라는 일본 교관이 훈련시킨 훈련대를 해산하는 것은 친러시아 정부를 만들려는 것이라 판단하고 정변을 일으켰다. 10월 8일 새벽 5시, 경복궁을 포위하고 있던 일본의 수비대 600명, 해산 명령을 받은 훈련대 800명, 일본 자객들이 궁궐 안으로 들어갔다. 대원군을 앞세운 침략이었다. 궁궐을 지키던 시위대가 맞섰지만 이내 무너졌고, 침입자들은 고종과 명성황후가 머물던 건청궁으로 돌진했다. 명성황후는 곤녕합 침실에서 궁녀들과 함께 숨어 있다가 건청궁 복도를 향해 도망갔고, 뒤따라가 시해한 사람은 일본 공사관의 순사였던 와타나베 다카지로였다. 지금까지 명성황후의 시해범은 민간인 출신의 일본 자객으로 알려졌지만, 사바찐의 기록을 볼 때 일본 공사관의 관료라는 것이 이 책의 주장이다.

국립중앙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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