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기자단
- 게시일
- 2010.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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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인사동 스캔들> 中
복원전문가 이강준이 벽안도의 복원작업을 맡게 된 후 언론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복원작업의 재료를 위해서는 온갖 방법이 동원됩니다. 먼저 당시의 물감을 준비하고 그리고 캔버스의 질감과 두께를 측정하고 그리고 독특한 재료를 찾아서 똑같이 만들고 재료가 준비되면 그때부터는 내가 아닌 그 화가가 되는 겁니다. 사소한 붓 터치, 생각, 삶과 마음까지 읽어내는 것이 가장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물론 작업하나가 끝날 때마다 사진과 각종 장비로 빈틈없이 확인합니다.”
영화 <냉정과 열정사이> 中
치이고리가 그린 그림의 복원작업 맡게 된 준세이는 복원 작업 중 독백을 한다.
“그림의 표면에 방부제를 발라서 색을 보호해. 죽은 화가의 영혼에 달라붙어 하나가 되는 감각으로. 나 자신의 영혼도 깨끗해지는 것 같은 정말 신성한 기분이 들어”
보존과학자의 이야기
고등학교 국사시간. 아마도 우리는 첫 수업에서 선생님으로부터 E.H.Carr의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해 배웠을 것이다. 그리고 누구나 기억하고 있는 E.H.Carr의 명언.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이다”를 들으며 밑줄을 치고 암기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E.H.Carr의 이 말을 삶 속에서 실천하고 있는 이들이 있다. 현존하는 역사 속에서 과거를 만나고 또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이들. 바로 ‘보존과학자’이다.
보존과학자는 언뜻 우리에게는 생소한 직업이지만, 영화 등의 매체 속에서 간간히 그 모습을 드러내 생각해 보면 그리 낯설기만한 직업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두 영화에 등장한 인물들의 대사는 보존과학자가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복원대상을 대하는지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다. 작가의 생각, 삶과 마음을 읽고 영혼이 깨끗해지는 듯한 신성한 기분을 느끼는 이들. 지나간 시간을 보수하여, 현재의 시간으로 만들어 주는 그들. 과학적이지만 또 현재와 과거를 연결하며 시간을 다루기에 감성이 묻어나는 이 직업을 가진 '보존과학자'에 대해 알아보자.
단순기술을 넘어선 종합과학으로
복원작업 전의 유물과 복원작업을 끝낸 유물 - 국립중앙박물관 ⓒ 김주우
보존이라는 개념은 복원에서부터 비롯되었다. 현대사회의 공산품 같은 경우에는 물건이 손상되었을 경우, A/S센터에 가서 맡기거나 여차하면 새로 구입을 할 수 있지만 오래된 물건, 특히 문화재적 가치가 있는 유물은 함부로 손을 댈 수 없다. 이러한 보존가치가 있는 물건을 복원하기 위해서는 전문적인 인력이 필요한데 이들이 보존과학자인 것이다. 이들의 영역은 복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복원된 물건을 항구적으로 보존하기 위한 과학적 처리까지 포함한다. 때문에 금속공학, 화학, 미술사학 등 총체적인 지식이 동원된다. 예전에는 복원전문가라고 불렸지만 최근에 와서 복원의 의미를 포괄하는 ‘보존과학자’로 불린다.
보존과학자를 만나다
보존과학에는 다양한 분야가 있다. 종합병원 안에서도 내과, 외과, 이빈인후과, 소아과 등 다양한 진료과목이 존재하듯 복원의 대상이 되는 유물에도 금속, 목제, 서화 등 개별적인 유물의 종류에 따라 세분화된 분야의 전문가들이 있다.
정재문화재보존연구소의 소장이자 용인대학교 문화재학과에서 보존분야를 가르치고 있는 박지선 교수(이하 박)는 서화류 복원의 국내 1인자로 불린다.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실 내 보존과학팀의 김경수 연구원(이하 김)은 목칠 공예품 보존처리의 전문가이다. 이들에게 보존과학과 보존과학자로서의 삶에 대해 들어보았다.
보존과학의 매력은 뭐라고 생각하세요?
박 : 교과서에서 보던 그림을 직접 대면할 때는 정말 경이로워요. 특히 보존과학자는 문화재의 의사라고 할 수 있어요. 문화재를 복원할 뿐만 아니라 가장 가까이서 그 유물을 만질 수 있고 그동안 몰랐던 점들을 알 수 있는 기회가 되니까요. 이런 과정에서 많은 비밀들을 밝혀내요. 복원작업과 보존처리를 하면서 그 당시 이 작품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과 그 시대에 쓰였던 재료들, 작가가 선호했던 취향 등을 파악할 수 있으니까요. 그건 보존처리를 할 때밖에 볼 수 없는 것들이거든요. 특히, 저 같은 경우에는 장황(비단이나 두꺼운 종이를 발라서 책이나 화첩, 족자 따위를 꾸미어 만듦)을 연구하고 있는데, 일제강점기 때 우리의 것으로 둔갑해버린 일본의 장황 형식과 우리전통의 장황은 분명 다르거든요. 이 일을 하면서 우리나라만의 아름다운 장황 형식을 찾고 세계에 알릴 수 있게 된 것은 제가 죽어서도 칭찬받을 일이라 생각해요.
김 : 우선 이 일은 지루하지가 않아요. 반복적이지 않거든요. 매번 같은 유물을 다루는 것도 아니고 설령, 같은 종류의 유물이라 하더라도 시대마다, 보존상태마다 다 달라요. 같은 문화재가 아니죠. 언제나 긴장을 해야 하고요. 또 내 손을 거쳐 복원된 문화재를 다른 곳에서 볼 때에는 뿌듯함을 느끼죠. ‘내가 한 일이 역사에 기록된다.’하는 자부심이 있어요.
보존과학자가 되기까지 필요한 덕목이나 소양은 무엇일까요?
박 : 무엇보다 인성적인 측면이 중요해요. 사람은 대화를 하다보면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반응이 있지만 문화재는 말을 못하잖아요. 얼마나 진심을 갖고 문화재를 대할 수 있을 것인가가 중요하죠. 문화재를 정말 좋아해야 해요.
김 : 꾸준해야하죠. 이 일이 한 두 해에 결과를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실제로 지난 2008년에 공개된 다호리 목관은 1988년에 출토된 것이에요. 무려 20여년의 복원작업을 거친 거죠. 또 아무래도 문화재를 다루다보니 차분해야하고 세심함도 빼놓을 수 없어요. 금동유물같은 경우에 시간이 지나면 녹이 스는데 유물의 녹을 벗겨내려면 일일이 현미경으로 작업을 해야 하거든요. 차분함과 꾸준함, 세심함이 결여되어 있다면 아무래도 이 일을 계속 하기는 힘들죠.
이 일을 하면서 특별히 힘든 점이 있다면?
박 : 이 직업은 정말 행복한 직업이에요. 하지만 일을 터득하기까지는 정말 힘들죠. 일본에는 도제식 교육이 보편화되어 있는데 처음 일을 배울 때에는 이런 일이 있었어요. 같이 일을 하던 친구가 할머니 장례식을 갔다가 무지하게 혼났죠. 자기 일에 집중을 못한다고요. 또 나무로 된 상을 걸레질 하는데 나뭇결 따라 상을 닦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큰일이 났어요. 결을 따라 닦지 않으면 나무가 상하게 되거든요. 허드렛일을 통해 조심하는 방법을 익히게 되는 거에요.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도제식 교육이 쉽지가 않아요.
김 : 항상 어렵죠. 늘 공부해야하고 연구해야 하니까요. 현실적인 어려움을 말하자면 이 분야의 특성상 정규직으로 일을 할 수 있는 여건이 잘 마련되어 있지는 않아요. 일의 수요는 꾸준하게 있고 형편이 점점 나아지고 있으나 아직은 제반이 잘 안되어 있다고 봐야죠.
두 전문가가 한결같이 언급하는 덕목은 인내심이다. 보존처리 과정에서도, 보존과학자가 되기까지의 방법적인 측면에서도 인내심은 필수 불가결한 요소이다. 복원과 보존은 몇 달이 걸릴지 몇 년이 걸릴지 알 수 없는 작업이다. 실제로 위에서 언급한 다호리 목관의 복원 책임을 맡았던 고 이상수 연구원은 목관의 복원이 완료된 모습을 보지 못하고 운명을 달리했다. 지난 시간과 현재를 연결하며, 그들은 그들 만의 특별한 시간을 살게 된다. 그리고 그 시간을 살기 위해선 자신이 하는 일의 성과를 직접 보고, 성취를 느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걸 감당할 만한 인내심이 필요하다.
보존과학자가 되는 길
그럼 어떻게 해야 보존과학자가 될 수 있을까? 우선 국내 보존과학의 역사부터 알아보자.
우리나라 국립중앙박물관에 보존과학실이 설치된 건 1975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개발지시로 온 국토가 속살을 드러낼 때 곳곳에 매장되어 있던 각종 문화재와 유물들이 출토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유물들을 복원하고 보존처리하기 위해 정부에서 전문가들을 초빙했고 그 이후, 이 분야에 대한 연구의 발판이 마련되었다.
때문에 현재 활동하고 있는 대부분의 인력은 순수 보존과학이 아닌 관련분야의 학문을 공부했다. 국내에서 금속공학, 화학, 역사학, 고고학, 회화, 조각 등의 학업을 마치고 이탈리아, 프랑스, 일본 등에서 보존과학업무를 배운 후에 일을 시작한 인력이 대다수이다. 이십여 년 전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에서 보존과학을 전문적으로 배울 수 있는 여건이 미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97년 국내 최초로 문화재보존학과가 용인대학교에 신설되었고 이후 점차 그 중요성이 부각되어 현재 7~8개 대학·대학원 과정에 문화재학과, 문화재보존학과가 개설되어 있다.
복원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 학생들 - 정재문화재보존연구소 ⓒ 김주우
이 분야 자격증으로는 한국산업인력관리공단에서 시행하는 문화재수리기술자 자격증이 있다. 경험과 숙련을 중시하는 업무 특성상 자격증에 대한 실효성은 업계일각에서 논쟁이 있지만 방법적인 기술을 국가에서 공인한다는 점에서는 의의가 있다. 응시 분야는 보수, 단청, 실측?설계, 조경, 보존과학, 식물보호 등으로 세분화되어있다.
보존과학 업계의 전망
보존과학이 일부 박물관에서만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물론 전국의 국·공립 박물관, 미술관과 몇몇 사립미술관에는 보존과학실이 설치되어 있으나 보존과학은 그 영역을 문화재와 유물로 한정짓지 않는다. 박물관, 미술관에서의 복원은 전시가 주요 목적이지만 집안의 훼손된 유물이나 오래된 물건을 복원하기 원하는 수요는 아직도 넘쳐나기 때문이다. 또한, 개별 작품이 재산으로서도 충분한 가치가 있고 실제로 고가에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기도 하다.(관련기사 - 미술품 경매, 어디까지 아십니까?)
모든 물건은 자연으로 회귀하려는 성질을 갖고 있다. 물건이 완성되고 복원된 순간에도 작품은 원래 성질로 돌아가기 위해 부식한다. 유물과 문화재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자연의 법칙을 거슬러 부식을 막는 것이 보존과학의 임무이다. 때문에 시간이 흐르고 가치 있는 문화재, 물건이 존재하는 한 보존과학의 전망은 밝다고 할 수 있다.
살아 있는 역사와의 독대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실 전경 ⓒ 김주우
하지만 아직까지, 보존과학자에 대한 처우가 좋은 편은 아니라고 한다. 예전에 비해서는 많이 개선되었지만 이 분야의 전문가가 아닌, 기능공 정도로 치부해버리는 사회 인식은 그들에게 버거울 수밖에 없다.
보존과학은 복원뿐만 아니라 유물에 대한 연구와 조사까지 병행해야하기 때문에 방대한 지식이 요구된다. 고독한 자기와의 싸움이고 반응이 없는 무기물과의 독대이다. 이 과정과 작업이 결코 만만할 리 없다. 하지만 유물은 죽은 것이 아니다. 역사 속에서 존재했고 지금 우리 곁에도 존재한다. 살아있는 역사인 것이다. 그 숨결을 직접 느낄 수 있다는 점은 역사와 유물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치명적인 매력으로 작용한다. 역사와 독대하고 싶은 이끌림이 있는 당신이라면 이 신비로운 보존과학의 세계에 문을 두드려 보자.
글/김주우(문화체육관광부 대학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