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무, 우리 몸짓의 경지를 보여주다. 중요무형문화재 이애주 교수 인터뷰
게시일
2011.12.01.
조회수
6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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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진

우리 몸의 경지 승무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예능보유자 서울대학교 이애주교수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후략) - 조지훈, <승무>


지난 17일 국립국악원 우면당에서 벽사 한영숙 선생 22주기 추모공연 <그 춤의 맥을 잇다>가 열렸다. 화려한 한복을 입은 한영숙 선생의 제자들이 벽파입춤, 살풀이춤, 태평무 등을 추었고 마지막 무대는 서울대학교 이애주 교수(중요무형문화재 제 27호 승무예능보유자)의 ‘승무’가 장식했다. 조지훈 시인의 <승무>처럼 하얀 고깔을 쓴 이애주 교수는 하얀 장삼을 하늘로 뿌리며 아름다운 승무를 선보였다. 느린 장단에 천근의 무게를 짊어진 듯한 발걸음은 큰 북 앞에서 역동적인 힘을 발산했다. 터져 나온 북 소리 뒤에는 관객들의 힘찬 박수소리가 공연장을 가득 메웠다.



“하루라도 춤을 추지 않으면 죽는 줄만 알았던 아이”


감명 깊은 공연이었습니다. 스승이신 한영숙 선생님의 22주기 추모공연이라니 추모공연에 ‘22’라는 숫자는 익숙하지가 않습니다.

한영숙 선생님의 제자들이 한해도 거르지 않고 매년 스승님을 기리는 공연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타계하신지 벌써 22년이 되었군요. 다른 기념공연은 10년 또는 20년 단위로 끊어가며 열리는 것이 보편적이지만 한해도 거르지 않고 선생님 추모공연을 하는 것은 세계에서도 유례 없는 일일 겁니다.


한영숙 선생님과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나요?

먼저 국립 무용단에서 김보남 선생님께 춤을 배웠어요. 그러다가 대학에 가면서 한영숙 선생님을 만나게 됐습니다. 당시 국립무용단 지도위원이셨고, 문화공보부에서 중요무형문화제로 한영숙 선생님이 지정됐거든요. 그 때 나는 한영숙 선생님께 배우고 싶었지만 먼저 찾아가서 배우고 싶다고 말씀드릴 처지가 아니었는데 선생님께서 먼저 연락이 주셨어요. “애주야, 승무 전수자로 배우러 오너라”하고 말이죠. 그 전부터 “애주 춤 잘 춘다”며 칭찬을 자주 해주셨거든요. 날아갈 듯 기쁜 순간이었죠.


이애주 교수님의 인생에서 ‘춤’은 빼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춤을 추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처음엔 배우지도 않고 췄습니다.(웃음) 동네 라디오 파는 곳에서 민요가 자주 흘러나왔는데 그걸 듣고 길거리에서 추기도 하고, 어른들 모임 같은 곳에서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춤을 추곤 했답니다. 어머니께서 문화적으로 앞선 분이셨는데 실제로 방정환 선생님께 유희도 배우셨고 피아노와 바이올린 수업을 받으셨을 정도로 문화적 소양이 있으셨던 분이었거든요. 부모님께서 내 재능을 알아보시고 정식 기관에서 춤을 배우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이애주

 

어려서부터 춤을 정말 좋아하셨나 보군요.

어릴 때부터 하루라도 춤을 추지 않으면 죽는 줄 알았습니다.(웃음) 학창시절 공부를 잘하는 편이었는데 어느 날은 일시적으로 성적이 떨어진 적이 있었어요. 그러니 부모님께서 “오늘은 춤추러 가지 말고 공부해라”하시며 밖에서 문을 걸어 잠그셔서 눈이 퉁퉁 붓도록 울기도 했죠. 그렇게 춤에 대한 열정으로 춤꾼 이애주의 인생은 시작됐어요. 그러다 대학교까지 들어왔는데 체육교육과 원로교수님께서 “자네가 우리나라 춤을 짊어져야 하네!”하시면서 대학원을 추천하셔서 여기까지 오게 됐어요. 대학교 3학년 때는 문화공보부 주최의 <신인예술상> 대회에 나가서 특상을 받기도 했답니다. 서울대 학생이 춤을 춘다고 해서 신문에 나기도 하고 잡지와 창간신문의 표지모델이 되기도 했죠.(웃음)



“역사가 요구하는 순간에는 꼭 춤을 추게 됐어요”


선생님의 춤에는 색이 있습니다. 무슨 색입니까?

춤에 대해 공부하다 보니 지금까지 사용했던 ‘무용’이라는 단어 자체가 일본식 용어였어요. 우리말로 써야겠다는 생각으로 찾아보니 ‘춤’이라는 좋은 말이 있었죠. 그렇지 않아도 ‘왜곡된 춤을 바로잡는 일환으로 용어부터 정리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다가 서울대 국문과에 편입했는데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하시던 분들을 국문과가 있는 서울문리대에서 만날 수 있었어요. 예를 들면 음악 쪽에는 김민기, 탈춤에 채희완, 연극에 임진택, 영화에 장선우 등 지금은 각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이런 사람들이 십여 명씩 모여 토론도 하고 행사도 했죠. 그런데 1974년에 ‘춤’이라는 용어를 쓰고 공연을 했더니 저에게 빨간색 색깔이 칠해졌어요. 당시 국립극장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올랐다는 이야기도 들렸고요. 용어를 우리식으로 바로 잡으려고 한사람을 ‘빨갱이 좌파’로 몰아세우니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죠.


그런 교수님의 춤에는 어떤 메시지를 담고 있었나요?

1970년 노동운동의 상징인 전태일이 분신하는 사건이 있었죠. 저는 그 불꽃을 춤으로 나타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것은 전태일의 몸에 붙은 불꽃을 형상화한 ‘불꽃 춤’을 추는 것이었죠. 또 1987년 5월 연우무대에서 ‘바람맞이 공연’을 했어요. 그 당시는 1월에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터졌었고, 동지와 선후배들의 고문경험을 전해 들으며 공권력을 두려워하던 시대였었죠. 저는 ‘춤으로 이 시대 인간성과 생명에 대해 말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마침 김덕수·이광수 사물놀이패와 뜻이 맞아서 연우무대의 공연을 성공적으로 할 수 있었죠.

이애주 교수님을 기억하는 많은 분들은 1987년 6월을 떠올립니다. 그 당시 교수님의 춤은 어떤 의미였나요?

같은 해 6월, 연우무대의 ‘바람맞이 공연’을 서울대 학생들이 학교에서 다시 해달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하기로 약속을 했는데, 갑자기 사물놀이패가 사정상 참여할 수 없게 됐어요. 그랬더니 학생회에서 나를 원망하는 거예요.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고 말이죠. 그래서 다음날 밤새 학생들로 이뤄진 춤패 ‘한사위’에게 장단을 가르쳤어요. 장단만 있다면 제가 춤을 출 수 있으니까요. 어려운 장단이었기 때문에 완벽하게 할 수 없었지만 틀만 갖춰두고 6월 26일 1시에 서울대학교 본부 앞 아크로폴리스에서 공연을 시작했어요. 관중이었던 각 단과대 학생, 대학원생들은 깃발을 들고 나왔고 의대생들도 하얀 가운을 입고 무대를 에워쌌어요. 국내외 기자들도 100여명이 몰려왔죠. 마침 같은 날 2시에 전국민주화대행진이 있는 날이었어요. 공연이 끝나니까 그 열기가 자연스레 집회로 옮겨 붙은 겁니다. 신문에서는 이애주 교수의 춤이 이 시위를 부추겼다고 쓰는 기사도 있었습니다.


이애주 

▲ 1987년 6월 서울대 아크로폴리스에서 이애주 교수.


한국 근현대사의 역사적 순간을 함께 하셨군요.

 역사가 요구하는 순간에는 꼭 춤을 추게 됐어요. 제주 4.3 사건에서부터 시작해 4.19 혁명, 부마항쟁, 광주 5.18 항쟁을 다뤄야 했죠. 매년 4월 3일 4·3 사건 기념행사를 했는데그곳에서 ‘진혼 살풀이’를 춰요. 그 이후에도 ‘부익부 빈익빈’을 주제로 ‘평등하게 나누어 먹자’는 의미의 ‘나눔굿’을 했고, 일제 강점기 때 끌려간 정신대·징용병 문제를 주제로 1984년에 ‘도라지꽃’이라는 춤을 췄어요.


그렇다면 현재 흐르는 역사가 이애주 교수님께 요구하는 춤은 어떤 춤입니까?

2013년 정전 60주년을 맞이해 이를 계기로 ‘생명과 평화’를 주제로 판을 벌리고 춤을 추고 싶어요. DMZ는 우리 분단의 흔적이자 역설적으로 ‘생명과 평화’의 상징이기도 하니까요. 



“정통적인 전통춤에는 우리 몸짓의 본질과 본성이 담겨있어요”


지금까지 서울대학교 체육교육과에 무용전공 교수님으로 남아있습니다. 무용과 어울리지 않는 ‘체육교육과’에서 학문적 외로움은 없으셨나요?

외로웠죠. 서울대에서 춤을 가르친다고 해서 왔는데 아무래도 체육은 서양 스포츠 위주로 가고 있더군요. 이런 점을 생각하면 너무 복잡하니까 ‘나는 민족의 몸짓인 한국 춤에 집중해서 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퇴임하면 어떻게 될지 잘 모르겠습니다. 1년 후면 서울대를 떠나는데 우리 몸짓에 대해 바른 생각을 갖고 우리 춤을 지킬 수 있는 분이 오시길 진심으로 바라고 있습니다.


무용 공연

▲ 서울대학교 체육교육과 무용부 학생들은 매년 가을에 정기공연을 하고 있다.


후학들에게 전해질 춤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지금도 잘못 추는 전통 춤이 너무 많아요. 나의 자부심 중 하나는 전통춤에서 ‘정통’ 춤을 구분하는 안목을 가졌다는 겁니다. 그리고 내 몸이 알고…‘진짜’를 찾는 작업이 중요해요. 정통적인 전통춤에는 우리 몸짓의 본질과 본성이 담겨있어요. 우리 삶의 역사가 담겨 있는 거죠.     


퇴임 후에는 어떤 계획이 있나요?

지금까지 해온 것을 잘 정리해야겠죠. 그리고 대학이라는 제도적 틀에서 벗어나 내가 하고 싶었던 문화 예술적 작업을 자유롭게 정리하고 싶어요. 또 우리 춤이 이 시대에 창조적인 몸짓으로 되살아 날 수 있도록 노력을 멈추지 않을 겁니다.


이애주 교수

▲ 무용사 수업에서 『대학』을 강의하는 이애주 교수


문화체육관광부 조병휘 대학생기자 서울대학교 체육교육학과 kurenaibw@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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