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자료
2007년도 국립중앙박물관 기획특별전 “하늘이 내린 재상, 류성룡”
- 게시일
- 2007.05.28.
- 조회수
- 3446
- 담당부서
- 국립중앙박물관(02-2077-9275,+)
- 담당자
- 박준호
- 본문파일
- 붙임파일
국립중앙박물관(관장 김홍남)은 2007년도 기획특별전 “하늘이 내린 재상, 류성룡”을 5월 29일(화)부터 7월 8일(일)까지 역사관 기획전시실에서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전란에 휩싸인 나라를 이끌어 갔던 명재상이며, 군사 전략가이며, 위대한 학자였던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1542-1607)의 서세 400주기를 기념하여 그의 삶을 조망하고자 마련된 것이다. 이 전시는 크게 류성룡이 어린 시절과 노년을 보냈던 하회 마을에 대한 이야기, 류성룡의 성장 과정과 그 가문의 이야기, 국난을 헤쳐 나가는 영웅의 이야기, 운둔의 길을 걷는 학자의 이야기, 그리고 영웅을 그리워하는 역사 이야기 등 5부로 구성된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는 하회탈(국보 제121호)과 징비록(국보 제132호), 이순신 장군 장검(보물 제326호) 등 쉽게 접하기 어려운 중요 문화재가 선보이며, 외부에 공개된 바 없는 안동 하회마을의 충효당(류성룡 종가) 소장 유물 모두가 한자리에 전시되는 등 총 120여점이 전시된다.
1부 전시는 하회 마을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하회 마을은 류성룡의 고향이며, 그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이기도 하다. 하회 마을의 별신굿 탈놀이에 쓰이는 하회탈은 특히 한국인의 얼굴을 대표하는 것으로도 유명한데, 이번 전시에서는 현존하는 9점의 탈 전체가 최초로 한자리에서 전시된다. 탈놀이의 내용은 지배 계층이었던 양반과 선비의 허위성을 폭로하는 것으로써 양반과 상민의 갈등 관계가 탈놀이를 통해 극화되고 있으며, 당시 피지배계층이었던 서민들의 삶의 애환을 풍자적으로 그리고 있다. 류성룡의 고향이었던 하회마을에서는 탈놀이를 통해 양반과 상민들의 신분적 차이에서 오는 갈등과 불만을 해소하였으며, 서로 조화롭게 공동체 생활을 꾸려 나갈 수 있었다.
2부는 류성룡의 성장과 그의 가문 이야기이다. 풍산 류씨들이 하회로 들어온 것은 류성룡의 6대조인 류종혜(柳從惠)가 명당을 찾아 풍산에서 하회로 이주하면서부터이다. 하회의 명당에 터를 잡은 류씨 가문은 이때부터 류성룡과 같은 인재를 여럿 배출하였다. 류성룡은 21살에 퇴계 문하에 들어가 그의 학맥을 이었으며, 25살에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여러 방면에 능력이 있었던 류성룡은 주요 관직을 거치는 빠른 승진의 길을 걸어갔다.
3부 영웅의 이야기에서는 류성룡이 입었던 갑주·평양성탈환도·각종 화포·이순신 장군 장검 등을 전시하며, 임진왜란 중에 류성룡이 제시했던 여러 정책과 업적을 보여주는 유물이 소개된다. 류성룡은 전란 중에 도체찰사로 있으면서 군무를 총괄하였고, 명나라 군대를 맞이하였으며, 평양성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순신 장군은 전쟁이 일어나기 1년 전 류성룡의 추천으로 정읍현감에서 전라좌수사로 관직이 몇 단계나 크게 올랐다. 이후 전라좌수사가 된 이순신은 일본군의 해상 통로를 봉쇄하여 전쟁의 승기를 잡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4부 은거의 길에는 임진왜란의 참상을 기록한 징비록이 전시된다. 1598년 탄핵으로 정계에서 물러난 류성룡은 고향 하회의 옥연정사로 돌아와서 저술과 제자 양성에 전념하였다. 1604년 임진왜란의 공훈으로 호성공신에 책봉되었으나, 이를 거절하였다. 특히 충훈부에서 공신의 초상을 그리기 위해 보낸 화사(畵師)도 공신 책봉을 거절하였다는 이유를 들어 다시 돌려보냈다. 그리고 그는 지난 전쟁의 참상을 반성하며 후손들이 다시는 전란을 되풀이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ꡔ징비록ꡕ을 저술하였다. ꡔ징비록ꡕ의 징비(懲毖)는 ꡔ시경(詩經)ꡕ의 ‘내 그 징계하는지라, 후환을 삼갈 수 있을까.(予其懲而毖後患)’라는 문구에서 따온 것이다. 결국 ꡔ징비록ꡕ은 지난날 임진왜란의 상처를 반성하고 앞날을 대비하기 위해 후손에게 남긴 고통의 기록이며, 반성의 기록이었다. ꡔ징비록ꡕ은 당시 국정을 총괄하였던 류성룡의 철저한 자기 반성적 저술로, 조선에서도 여러 번 간행되었을 뿐만 아니라 침략국이었던 일본에서까지도 널리 출간되었다.
5부는 영웅을 그리워하는 역사의 이야기이다. 세상을 떠난 류성룡의 업적을 평가하는 여러 기록들이 전시된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정조 임금의 글이다. 정조는 화성을 건설하고, 장용영을 만들며, 여러 현실적인 정책을 구상하면서 류성룡이 전란 중에 추진했었던 여러 정책을 참고했다. 그러면서 정조는 류성룡에 대해 시대를 뛰어넘는 그리움을 표현하기도 하였다.
이번 전시에서는 조선시대의 위대한 재상 류성룡의 일대기를 중심으로 그가 남긴 여러 역사적 자료를 전시함으로써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진정한 영웅의 역사적 전례를 찾고자 하였다. 그 역사적 전례로써 류성룡은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방면에 능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 능력은 나라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더욱 빛을 발하였던 것이다.
이번 전시 기간 중에는 안동의 유교 문화와 관련한 특별 강연회가 마련되어 있다. 6월 23일(토) 오후 1시부터 국립중앙박물관 교육관에서는 ꡔ안동 하회마을을 찾아서ꡕ의 저자이기도 한 서수용(박약회 감사)의 “왜 안동 하회마을인가”에 대한 특별 강연회와 “안동 하회 풍산류씨가의 전통과 학문”이라는 제목으로 한국학중앙연구원 권오영 교수의 특별 강연이 있을 예정이다.
이번 전시는 전란에 휩싸인 나라를 이끌어 갔던 명재상이며, 군사 전략가이며, 위대한 학자였던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1542-1607)의 서세 400주기를 기념하여 그의 삶을 조망하고자 마련된 것이다. 이 전시는 크게 류성룡이 어린 시절과 노년을 보냈던 하회 마을에 대한 이야기, 류성룡의 성장 과정과 그 가문의 이야기, 국난을 헤쳐 나가는 영웅의 이야기, 운둔의 길을 걷는 학자의 이야기, 그리고 영웅을 그리워하는 역사 이야기 등 5부로 구성된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는 하회탈(국보 제121호)과 징비록(국보 제132호), 이순신 장군 장검(보물 제326호) 등 쉽게 접하기 어려운 중요 문화재가 선보이며, 외부에 공개된 바 없는 안동 하회마을의 충효당(류성룡 종가) 소장 유물 모두가 한자리에 전시되는 등 총 120여점이 전시된다.
1부 전시는 하회 마을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하회 마을은 류성룡의 고향이며, 그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이기도 하다. 하회 마을의 별신굿 탈놀이에 쓰이는 하회탈은 특히 한국인의 얼굴을 대표하는 것으로도 유명한데, 이번 전시에서는 현존하는 9점의 탈 전체가 최초로 한자리에서 전시된다. 탈놀이의 내용은 지배 계층이었던 양반과 선비의 허위성을 폭로하는 것으로써 양반과 상민의 갈등 관계가 탈놀이를 통해 극화되고 있으며, 당시 피지배계층이었던 서민들의 삶의 애환을 풍자적으로 그리고 있다. 류성룡의 고향이었던 하회마을에서는 탈놀이를 통해 양반과 상민들의 신분적 차이에서 오는 갈등과 불만을 해소하였으며, 서로 조화롭게 공동체 생활을 꾸려 나갈 수 있었다.
2부는 류성룡의 성장과 그의 가문 이야기이다. 풍산 류씨들이 하회로 들어온 것은 류성룡의 6대조인 류종혜(柳從惠)가 명당을 찾아 풍산에서 하회로 이주하면서부터이다. 하회의 명당에 터를 잡은 류씨 가문은 이때부터 류성룡과 같은 인재를 여럿 배출하였다. 류성룡은 21살에 퇴계 문하에 들어가 그의 학맥을 이었으며, 25살에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여러 방면에 능력이 있었던 류성룡은 주요 관직을 거치는 빠른 승진의 길을 걸어갔다.
3부 영웅의 이야기에서는 류성룡이 입었던 갑주·평양성탈환도·각종 화포·이순신 장군 장검 등을 전시하며, 임진왜란 중에 류성룡이 제시했던 여러 정책과 업적을 보여주는 유물이 소개된다. 류성룡은 전란 중에 도체찰사로 있으면서 군무를 총괄하였고, 명나라 군대를 맞이하였으며, 평양성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순신 장군은 전쟁이 일어나기 1년 전 류성룡의 추천으로 정읍현감에서 전라좌수사로 관직이 몇 단계나 크게 올랐다. 이후 전라좌수사가 된 이순신은 일본군의 해상 통로를 봉쇄하여 전쟁의 승기를 잡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4부 은거의 길에는 임진왜란의 참상을 기록한 징비록이 전시된다. 1598년 탄핵으로 정계에서 물러난 류성룡은 고향 하회의 옥연정사로 돌아와서 저술과 제자 양성에 전념하였다. 1604년 임진왜란의 공훈으로 호성공신에 책봉되었으나, 이를 거절하였다. 특히 충훈부에서 공신의 초상을 그리기 위해 보낸 화사(畵師)도 공신 책봉을 거절하였다는 이유를 들어 다시 돌려보냈다. 그리고 그는 지난 전쟁의 참상을 반성하며 후손들이 다시는 전란을 되풀이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ꡔ징비록ꡕ을 저술하였다. ꡔ징비록ꡕ의 징비(懲毖)는 ꡔ시경(詩經)ꡕ의 ‘내 그 징계하는지라, 후환을 삼갈 수 있을까.(予其懲而毖後患)’라는 문구에서 따온 것이다. 결국 ꡔ징비록ꡕ은 지난날 임진왜란의 상처를 반성하고 앞날을 대비하기 위해 후손에게 남긴 고통의 기록이며, 반성의 기록이었다. ꡔ징비록ꡕ은 당시 국정을 총괄하였던 류성룡의 철저한 자기 반성적 저술로, 조선에서도 여러 번 간행되었을 뿐만 아니라 침략국이었던 일본에서까지도 널리 출간되었다.
5부는 영웅을 그리워하는 역사의 이야기이다. 세상을 떠난 류성룡의 업적을 평가하는 여러 기록들이 전시된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정조 임금의 글이다. 정조는 화성을 건설하고, 장용영을 만들며, 여러 현실적인 정책을 구상하면서 류성룡이 전란 중에 추진했었던 여러 정책을 참고했다. 그러면서 정조는 류성룡에 대해 시대를 뛰어넘는 그리움을 표현하기도 하였다.
이번 전시에서는 조선시대의 위대한 재상 류성룡의 일대기를 중심으로 그가 남긴 여러 역사적 자료를 전시함으로써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진정한 영웅의 역사적 전례를 찾고자 하였다. 그 역사적 전례로써 류성룡은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방면에 능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 능력은 나라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더욱 빛을 발하였던 것이다.
이번 전시 기간 중에는 안동의 유교 문화와 관련한 특별 강연회가 마련되어 있다. 6월 23일(토) 오후 1시부터 국립중앙박물관 교육관에서는 ꡔ안동 하회마을을 찾아서ꡕ의 저자이기도 한 서수용(박약회 감사)의 “왜 안동 하회마을인가”에 대한 특별 강연회와 “안동 하회 풍산류씨가의 전통과 학문”이라는 제목으로 한국학중앙연구원 권오영 교수의 특별 강연이 있을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