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공연
서용선: 모건 애비뉴 300 | Suh Yongsun: 300 Morgan Avenue
- 분야
- 전시
- 기간
- 2024.11.15.~2024.12.28.
- 시간
- 화~토 11:00 - 19:00
- 장소
- 서울 | 갤러리JJ
- 요금
- 무료
- 문의
- 02-322-3979
- 바로가기
- https://www.galleryjj.org/
전시소개
“세상이라는 것은 어제나 내일이나 항상 우리 스스로의 이미지를 보게 할 뿐…” ―보들레르, 『악의 꽃』, 1857
갤러리JJ는 ‘그리기’를 중심으로 ‘인간’ 탐구를 실천해오고 있는 작가 서용선의 개인전을 개최한다. 이번 전시 《모건 애비뉴 300》은 갤러리JJ에서 열리는 서용선의 5번째 전시로, 작가가 지금까지 해온 여러 작업들 가운데 뉴욕에서 실행했던 작업에 초점을 맞춘다. 그는 1992년 뉴욕을 처음 방문한 이후부터 올해 여름까지 약 25 차례 꾸준히 드나들며 짧게는 2개월 내지 길게는 6개월까지 머물며 작업했다. 현재 작가의 ‘도시’ 그림 가운데 뉴욕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뉴욕이라는 타국의 공간과 삶에 있어서 어느덧 체험이 누적되고 작가의 새로운 시선은 섬세함이 더해졌다. 전시는 그가 관찰하고 몸담아 감각한 현대도시의 삶과 회화적 공간의 다양한 표현 방식, 그 확장성에 주목하면서 과연 보편적 지구촌 시대의 삶의 조건은 무엇인지, 이 도시가 서용선의 예술 세계에 미친 영향 등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전시 제목인 ‘모건 애비뉴 300’은 최근 여름에 거주했던 브루클린에 위치한 뉴욕 스튜디오의 주소이다. 전시는 30여년 사이의 뉴욕행 가운데 가장 최근인 2024년 ‘도시’ 작업을 중심으로, 초기의 일련의 작품들도 함께 구성하여 뉴욕 작업의 맥락을 이어간다. 5미터가 넘는 길이의 대작 <34th St.>(2017-2024)에서부터 종이 드로잉과 일기를 비롯한 자료들이 함께 전시된다. 화려한 도시의 겉모습을 제치고 그가 집요하게 반복 제시하는 거리, 카페, 지하철의 장면에서 익명화된 도시민의 어색하고 불안정한 모습은 군중 속에서 더욱 심화된다. 그것은 고독과 소외로 내몰린 도시인의 내면이 드러나는 것일 수 있다. 특히 올여름의 작업 역시 자신이 자주 이용했던 근처 <메트로폴리탄+부쉬윅 역>(2024) 작품을 비롯하여 지하철 그림이 절반을 차지한다. 대중교통과 공공장소라는 익숙한 일상을 이토록 낯설게 보여주는 서용선 특유의 도시 오디세이다. 정치와 경제 발전 과정에서 미국 의존도와 함께 가장 닮은 나라가 한국이라고 할 수 있으니, 월가의 성공과 더불어 소비 자본주의의 대표 도시인 뉴욕의 삶의 방식 또한 쉬이 공감이 간다. 전시에서 한 작가의 예리한 시선과 감각을 통하여 나의 모습을 만나고 우리가 속한 사회 시스템, 이상과 현실의 간극, 삶을 마주하는 일은 무척 진지하고도 흥미롭다.
“창 밖 여기저기서 대형트럭의 엔진 시동 소리가 들린다. 새벽공기를 가르는 차량의 속도감 있는 공기를 가로지르는 소리가 들리고, 브루클린의 창고 먼지를 머금은 공기가 실내로 밀려들어온다.” ―뉴욕 일기 2024
서울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는 작가는 오랜 기간 경기도 양평 작업실 외에도 대도시인 베를린과 멜버른, 시드니, 베이징, 파리, 시애틀 등 레지던시에 참가하거나 단기 작업실을 마련하여 몇 개월씩 머물며 작업해왔고 최근으로 올수록 뉴욕에서의 시간이 늘어났다. 이러한 작가의 행보는 노마드적 취미나 주변에 널린 미디어 속 매끈한 이미지를 통해서 가능한 일이 아니라 결국 지구촌 곳곳 삶의 세계 속으로 직접 들어가 목격하고 몸으로 체험하는 일이기에, 인간을 궁금해하고 도시에서 현대 삶의 특징을 찾아나가는 작가로서는 숙명과 같은 일처럼 보인다.
서용선의 작업은 특유의 표현적 터치와 함께 압축적인 구조와 질서의 강렬한 화면으로 잘 알려져 있다. 작업의 모든 시각적 형상은 ‘회화’ 매체에 대한 본질적인 탐구와 함께 기본적으로 사람에 대한 관심으로 함축될 수 있으며 이는 곧 현대인, 인간의 삶을 조건 짓는 ‘사회’와 관계를 맺으면서 지금까지 도시와 역사, 인물과 자화상, 자연풍경과 신화 등으로 나타난다. 노산군과 김시습, 한국전쟁 등의 역사를 거듭 재소환하여 사건에 휘말리고 잊혀진 개인을 상정하고, 인간의 원형을 찾아 자화상은 물론 소나무 그림을 비롯한 풍경, 신화를 그리고 있다. 오랫동안 드나들었던 폐광도시 철암(2001년~)이나 최근 농민항쟁의 장소인 신안 암태도 등 역사적 배경이 녹아든 진솔한 삶의 현장에 거침없이 뛰어든 행보는 물론 특히 현대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도시 혹은 도시인의 심리상태, 지구촌 사람들이 살아가는 본모습을 찾아서 ‘도시 그리기’를 오랜 기간 동안 실행해오고 있다.
그의 작업에는 사람과 그 사람이 몸담은 상황이 함께 놓인다. 곧 역사의 주변부 인물들과 현재 작가 자신이 대면하는 현대도시 상황에 처해진 무표정한 인간 존재, 비동시적이지만 겹쳐져 보이는 이들의 부조리한 삶의 현장에 내재한 메커니즘 혹은 보이지 않는 힘에 주목한다. 이러한 것들은 작업에서 비현실적인 평면 즉 힘찬 직선, 왜곡된 색채와 형상이 빚어내는 불가사의한 에너지와 긴장감으로 나타난다. 작가의 오랜 관심사인 인간의 형상과 서술적 사실의 표현은 이집트 벽화와 고구려 벽화와 같은 원초적 그리기에 대한 생각과 1980년대 당시 새로운 형상에 대한 관심을 거치면서, 재현과 추상을 오가는 표현 방법으로 ‘현대라는 시대적 특성을 지닌 인간의 형상’, 역사 인식에 대한 고민을 ‘표현’하기에 이른다. 그는 사건의 흔적과 기억을 시각적으로 재현함에 있어서, 도시 시리즈부터 역사 시리즈(1986년~) 등 십수 년 전에 시작하여 현재까지도 대상을 끊임없는 관찰과 확인으로 재해석하고 판단을 유보한 채 지속적으로 제시한다.
현재는 곧 미래의 역사이자, 지나간 현상과 시간의 흔적이다. 작가에게 도시는 현재의 역사로, 도시 그림은 역사 그림과 마찬가지다. 현대라는 시대 변화에 따른 삶의 형태를 쫓아 도시 그림이 본격적으로 나오게 된 것은 작가가 화단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1984년 무렵으로, 서울에서 점차 세계의 다른 대도시로 확장하면서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사실 고대도시부터 도시의 역사는 인류사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도시는 모든 역사적 삶의 양식을 담은 공간이다. 서용선의 도시 그림, 뉴욕행은 이러한 맥락에서 작업들 상호 연장선에서 다양하게 읽혀진다.
“내가 보았던 스타벅스 커피집의 입구와 노래하는 남자, 지하철 사람들은 일상의 모습으로, 내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증명하고 서로의 기억을 그 사실성을 비교하게 만들 것으로 추측된다. 그것은 우리들의 인식 과정을 형태와 물질감으로 들여다보게 만들며 또한 붓으로 비빈 행위의 축적으로, 이러한 사람들의 몸짓을 통해 이 시대 보편적 행위를 확인하게 된다. 또한 이 그림들은 세계 속 한 장면으로 의미를 갖기도 한다.” ―서용선 2023
뉴욕
“브로드웨이로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오? ··· 난 중심지로 가고 싶소!” ―존 더스패서스, 『맨해튼 트랜스퍼』, 1925
작업실 창문에서 바라본 거리 전경, 록펠러센터의 지하 공공장소와 수많은 지하철 그림들, 그 안에는 각자의 휴대폰을 들여다보거나 주고받는 시선 없이 무표정한 사람들이 있다. 화면에는 예전의 긴장감이 가득한 짙은 갈색과 어두운 빨강 대신 좀더 밝고 투명한 붉은 색이 들어섰다. 시드니와 멜버른의 화사한 카페의 공기, 녹색빛 베를린에 비해 뉴욕은 늘 거친 선이 난무하는 어두운 갈색과 회색빛 도시의 표정이었다면 이제 좀 더 밝은 색깔이다. 뉴욕에서 점차 느끼는 작가 개인의 심리적 안정감에서인지 모른다. 작품 <메이시스>(2022, 2024)에서 빨간별 로고와 춤추는 여성을 화면에서 크게 부각하듯이 작가는 나름의 독특한 시점을 담아 이를 부각하여 표현하는 방식으로 구도와 색상을 결정한다. 이 작품은 각종 기념일에 백화점 문 앞에서 벌어지는 행사를 그린 것으로 소비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 빨간별 로고가 익숙한 메이시스백화점은 19세기에 설립된 미국의 가장 오래된 국민 백화점 같은 곳으로 500여개의 매장과 대중적인 초대형 쇼핑공간을 자랑한다.
뉴욕은 수많은 미술관과 갤러리를 비롯하여 예술과 문화의 도시인 동시에 화려한 경제적 부의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는 도시로, 도시적 세련미로 대변되는 뉴요커와 초고층 빌딩들, 트렌디한 감각의 레스토랑과 하이엔드 브랜드로 볼거리가 가득하다. 익숙한 환경을 벗어난 여느 대도시에서와 마찬가지로 이곳에서도 대체로 그는 가까운 카페나 맨해튼을 오가면서 자신의 주변을 탐색하고 관찰한다. 가령 고급 레스토랑보다는 던킨도너츠와 스타벅스처럼 대중의 일상이 되어버린 카페, 거리, 저렴하고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대중교통 공간이다. 자신의 일상 테두리 범위로 한정될 수 있는 점도 있지만, 도시의 화려함에도 애초에 그의 시선은 하루하루를 그저 바삐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일상의 시민들, 후기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느라 비본질적 삶에 내몰린 사람들로 향해 있었다. 그것은 고도의 자본주의 시장 시스템 하의 소외와 파편화된 현실의 노출과 관련한다.
제2차세계대전 이후 현대미술의 메카로 우뚝 선 도시인 만큼 늘 트렌디한 전시가 열리고, 서양미술사를 통째로 갖다 놓은 듯 우리에게 친숙한 작품들이 가득한 점에서 뉴욕은 매력 있는 도시임에 틀림없다. 작가는 거리에서 지켜본 백화점 행사에서는 물론 이러한 엄청난 규모의 미술관과 예술품을 향유하는 문화적 현상 뒤편에 거대하게 움직이는 자본의 힘의 구조를 본다. 작품들은 도시의 건축 경관 속 통제와 강요로 도시공간을 점령하고 있는 각종 기호들을 보여주고, 거리에서 마주칠 수밖에 없는 체이스은행이나 ATM 기계 등 각종 사인보드가 도시 자본화의 지표임을 상기시킨다. 그는 일상에서 마주치는 도시의 기호들과 익명의 사람들에게서 호기심을 느끼고 특히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장소 이동과 현대사회의 속도를 생각한다.
도시
뉴욕이 작가의 관심을 먼저 끌었던 점은 도시 집중 현상, 고도로 발달한 문화 현상과 다양성에 있다. 그에게 이 도시는 그 어느 곳보다도 현대인의 욕망, 새로운 기술과 에너지가 몰리는 현상을 시각적으로 확연히 드러나는 장소다. 현대사회에 이르러 발달한 건축술과 과학기술, 대중교통을 포함하여 현대의 특징적 현상이 집적된 도시로 사실 뉴욕만 한 곳이 없다. 도시라는 거대한 대상은 인간의 욕망으로 탄생한, 영원한 유토피아적 열망의 재현으로, 이제 온전한 대상이기보다 메를로 퐁티가 말한 자연이 그러하듯, 우리가 몸담은 지반인 듯하다. 소멸되는 도시가 있는가 하면 인류는 다시 혁신기술로 무장한 최첨단의 미래도시를 꿈꾼다. 자연과 결별한 현대 도시는 오늘날 우리가 선택한 삶의 방식이며, 도시의 본질은 그 안에 사는 사람들로 설명될 수밖에 없다.
“국가의 경계는 희미해지고 그것을 관리하는 권력만이 노출되고 있다. 우리의 눈은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고 새로운 도시를 마주한다. ··· 그림은 언제나 새로운 생각들이 만들어내는 물건들이다.” ―서용선 2017
근대로 이동하면서 발생하는 도시화의 형성과 팽창에 따른 여러가지 새로운 양상들, 그 과정에서 변해가는 삶의 형태가 있다. 일찍이 보들레르는 도시를 대상으로 새로운 삶에 대한 특정한 태도를 현대성(Modernity)으로 지칭했고 이후 벤야민에게는 현대라는 시대가 그 얼굴을 드러내는 곳이 바로 메트로폴리스였다. 현대라는 용어는 전통적인 삶의 방식과의 단절이 가져온 삶에 대한 새로운 방식 또는 패러다임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작가는 70년대와 80년대를 거치면서 급격히 변해가는 서울의 도시화를 직접 체험하면서 ‘도시’를 현대의 가장 큰 특징이자 기호로 보았고, 이를 작업의 대상으로 삼아 현대사회의 문제의식 즉, 도시를 일구어 나가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흔적과 양상들을 표현하고자 했다. 1990년대 서울의 그림들은 작가가 주로 출퇴근으로 오가면서 만나는 삼성이나 코카콜라 등의 각종 광고판들과 자동차들로 번잡한 거리와 버스 장면이었다. 당시 역삼역 등의 사인이 있는 역 입구를 그린 정도가 몇 있다면, 뉴욕 그림은 지하철이 도시의 주요 공간이다. 그가 체험한 도시 그림은 현재까지 도시의 역사와 함께 견고한 시스템 속에서 대중이라는 익명성으로 개인들이 처하게 되는 문제나 심리 상태, 당연시 여기는 제도와 관습을 향해 끊임없이 질문한다.
지하철
“<생각-걷기, 18th Ave>… 오른쪽 지하철에 앉아있는 노인의 모습이 걷기운동 중 스치는 기억으로 남았다. 허술한 옷차림에 약간 지친 모습…” ―뉴욕 일기 2023
일기에는 ‘걷기운동’이라는 표현을 쓸 만큼 뉴욕에서는 걷는다는 것, 걸으며 생각하고 관찰하고 끊임없이 스케치하는 것이 작가의 일상으로, 자동차 대신 뉴욕에서는 주로 걷기와 지하철이 작가의 이동수단이다. 이때 그는 사진을 찍기보다 스케치북을 들고 다니며 현장에서 바로 드로잉을 하여 순간을 생생하게 포착한다. 잘 알려진 서용선의 수많은 지하철 그림은 여러 면에서 독보적이다. 양적인 면에서나 지하철이라는 소재 면에서나 그 평범한 장소가 보여지는 방법과 화면에서 느껴지는 불가사의한 분위기와 강렬함에 기인할 것이다. 작가가 보는 도시 현상 중 빼놓을 수 없는 요소가 지하철이며, 이는 현대도시의 상징이다. 그림에서 뉴욕 지하철은 1995년 작품 <맨해튼의 지하철>을 시작으로 지금까지도 작품 제목부터 정확히 N, L, D, F, 7, 6 라인 그리고 14가, 34가 역, 다운타운행, 퀸즈철로 등 때마다 작가의 이동 수단이었던 각 노선에서의 경험과 분위기로 다양하게 등장한다. 거기에는 시간차를 두고 그 한정된 공간 속에서 일어나는 사람들의 다양한 상황과 조건이 있다. 지하 공간 속 상승과 하강의 수직 방향과 이동을 일깨우는 구조, 질주경(dromoscopie)인 듯 차창 밖과 안의 전경이 섞여 들어가는 불확실한 구조, 주목하는 사람과 사물의 움직임에 따라 비현실적인 크기나 색상 및 선의 강약이 단호하다.
작가는 뉴욕의 지하철에서 서울 지하철의 경험과 달리 120년도 더 지난 시기에 지어진 건축물 구조 자체가 노출된 듯한 강철 H빔들이 주는 시각적 충격과 지하 공간을 울리는 육중한 쇳소리의 굉음에서 원초적 느낌을 늘 받는다고 말한다. 그것은 실로 위협적이기까지 하다. 자본의 질주와 지하철의 운동이 대략 상응한다는 말처럼, 국가권력의 통제 계획에 따라 날로 거대해지는 지하철 시스템은 도시 내 혈관처럼 얽혀서 대규모의 사람과 물자를 실어 나르며 빠르고 효율적으로 노동력을 도시 곳곳에 공급한다. 이동 및 원격 통신수단은 가속을 통해 우리와 사물의 시공간 관계를 근본적으로 바꿔 놓는다. 불안감은 인체가 따라갈 수 없는 속도와 함께 힘에 대한 본능적 감각이다. 일찍이 20세기 초 사회학자인 게오르그 지멜이 대중교통체계 안에서의 낯선 어색함과 소통 부재를 언급했듯이, 현대인은 지하철에서 새로운 공간 체험을 하게 되었다. 서용선의 지하철 그림들은 움직이는 속도에 밀어 넣은 몸의 감각이나 갇힌 공간에서의 신체 통제, 밀폐된 좁은 공간에 모여 앉은 낯선 타인들과의 상호작용과 무기력한 심리 상태의 재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대도시에서 사람들이 맺는 파편적인 인간관계의 본질에 다름아니다. 작가는 ‘이동하는 공간 속에서 무기력해진 도시민의 모습’에서 우리 모두가 도시 자본의 구조 속에서 스스로 한정된 공간을 배정받으며 그것에 만족하고 있는지 생각하게 된다고 말한다.
작가는 다른 도시를 방문할 때도 역시 그곳의 주요 교통수단에 주목하여 베를린은 운하와 지하철, 호주 멜버른에서는 트램이나 신호등이 있는 건널목으로, 베이징에서는 버스 특히 자전거를 타는 무리로 나타난다. 일찍이 도쿄를 처음 방문했던 1985년 당시 열차 탑승구를 그린 <도쿄역>, <도쿄전철> 드로잉이 있어, 이에 대한 관심은 생각보다 그 시기가 이르다. <뉴욕, 지하철 입구>(1997, 1998)는 그보다 이른 서울의 <숙대 입구 07:00-09:00>(1991)를 상기시킨다. 지하에서 올라오는 정장 차림의 남자는 당시 작가가 주목했던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출퇴근하는 직장인의 모습으로, 스트라이프 패턴과 가는 철망의 구조와 함께 스산하고 불안정한 도시 모습을 야기한다. 2000년대 초반까지도 사람도 보이지 않는 그저 아래로 뚫린 듯한 작은 지하 구멍으로 내려가기가 꺼려졌다면, 이제 대부분의 역사는 밀려드는 이용객들과 때로 음악 퍼포먼스로 분주하게 이동의 노곤함을 잊게 만든다. 이 공간에는 지하의 미로에서 질서를 체계적으로 유도하고 침묵으로 사람들을 통제하기 위한 수많은 기호들이 모여있다. 작업에는 특히 출구 사인을 자주 볼 수 있다. 권위적인 ‘EXIT’ 텍스트는 보여지는 순간 오히려 언제든 탈출해야 할 공간임을 스스로 노출하는 기호로도 보인다.
지금까지 서용선의 화면에는 텍스트가 자주 등장한다. 때로 텍스트가 전체 화면을 리드하기도 한다. 작품 <한인타운>(2024)의 마치 한데 모아 놓은 듯한 각종 간판들 모습은 32번가에 있는 실제 건물의 파사드로, 화면 속 한국인 이민자 문화가 함축적으로 들어있는 사인보드는 이곳이 이민의 나라, 멜팅팟임을 각성하게 만드는 시각적 텍스트 역할을 한다. 시간의 층위, 이국에서의 삶의 방식이나 애환이 담긴 단어들이 격자 형태로 화면을 채우는 구도는 시선을 피할 데 없이 우리 앞을 막아선다.
작가는 이러한 이민자의 삶, 특히 할렘이나 브루클린에서 남미와 아프리카인 등 다양한 인종들로부터 새로운 삶의 방식을 만나면서 그들을 이해하고, 자신이 관습적으로 가지고 있던 편견을 인식하고 수정해 나가곤 한다. 그는 자신조차도 새로움 속에서 태어나고 있다고 말한다. 작가는 이렇게 결코 ‘객관적일 수 없는’ 눈앞에 보이는 현실을 계속하여 새로운 그림으로 제시하고 끊임없이 자기 존재를 확인해 나간다. 한국에서 볼 수 없는 이질적인 면에 더 눈길이 가면서, 다민족, 다문화의 도시 뉴욕에서 다소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의 도시 작업이 인간에 대한 애틋함이 묵직하게 묻어나며 삶의 세계를 향하여 밀도와 깊이를 더하고 있음은 자명해 보인다. 모든 형이상학적 가치와 결별한 채 일시적이고 우연적인 것, 거대한 매스미디어 환경에 무기력하게 노출되어 살아가는 현실에서, 존재와 사물의 근원, 본질에 대해 질문하고 탐색해 나가는 서용선의 여정은 그래서 더 귀하고 아름답다.
“인간이 한계 지어서 주어져 있는데, 그 속에서 그걸 극복하려고 애쓰는 것, 그것을 옆에서 보면서 공감하는 것, ··· 자신이 하는 일에 집중해서 순수하게 그것을 헤쳐 나가려고 하는 ‘멋’ 같은 것을 어떻게 그림 속에서 형태로 담느냐 이런 생각을 갖는 편입니다.” ―서용선 뉴욕 인터뷰 2024.7.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