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공연
Objemage(Objet+Image) : Postcard
- 분야
- 전시
- 기간
- 2024.10.23.~2024.12.27.
- 시간
- 오전 10시 30분 ~ 오후 6시
- 장소
- 서울 | 갤러리밈
- 요금
- 무료
- 문의
- 02-733-8877
- 바로가기
- http://www.gallerymeme.com/web/main.html
전시소개
권대훈의 포용적 조형론 : 구상(救像)하라!
심상용(서울대학교미술관 관장)
숲속에서 길을 잃다
‘Still in the Forest’, 권대훈의 2020년 개인전 주제였다. 숲속에서 길을 잃었던 이전의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길 잃은 숲에서 그는 잊을 수 없는 착시(錯視)를 경험했다. 형상들에 돌연 변형이 일어났고, 어떤 나무들은 사람의 형상이 되었다. 시지각이 심리상태와 긴밀히 연동되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어떤 순간이나 사건은 그 인상이 너무 강렬해서, 우리의 마음과 영혼에 각인된다. 시각 경험도 크게 다르지 않다. 가슴과 영혼에 새겨져 삶 전체를 아우르는 미학의 형성에 결정적으로 관여한다.
권대훈은 다양한 출처에서 온 이미지를 연출된 빛의 상황 안에 위치시킨다. 새로운 맥락이 형성된다. 드로잉은 능란한 소조 솜씨로 빛어진 신체를 입는다. 그 위로 이미 조각의 일부가 된 이미지로서의 빛과 실제 조명에서 오는 빛의 이중의 접속이 있다. 오늘날 디지털화된 과정으로 대체되었거나 되는 중인, 모든 아날로그 과정들의 즐거운 복원이다. 발상은 빅데이터가 아니라 작가의 경험과 기억에서 오고, 대체로 땀과 노동 등 전통적인 소조나 회화의 과정을 거친다.
‘본다(seeing)’는 행위에 대하여: 정확히 하자. 생물학적 기관으로서 ‘눈’은 빛의 수용체, 매개체, 카메라의 렌즈와 다르지 않다. 그것만으로는 ‘본다(seeing)’는 행위의 초보적인 이해조차 불가능하다. 빛의 농도를 조절하고, 기관의 표면에 상(像)을 맺히게 하는 과정은 본다는 사건 전체에서 극 초입에 지나지 않는다. 보는 행위는 마음과 영혼에 맞닿아 있다. 존재의 기원, 자연과 사물에 대한 선-이해 (先-理解)까지 그것에 치밀하게 침투한다. 이 점에서 존재의 봄(seeing)은 비존재, 짐승의 그것과 그 뿌리부터가 다르다.
인간의 봄(seeing)은 대상과 대상의 이면, 대상 너머를 동시에 포괄하는 삼중의 인식행위고, 그로 인해 생각은 존재론적으로 공명하고, 마음은 정화와 심화의 과정을 밟아나가는 존재론적 사건이다. 사람들은 석양을 보면서 과거의 기억을 호출하고, 흐르는 강물을 보면서 스스로를 영겁의 시간으로 인도한다. 물(水)을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에겐 근원에 다가서는 길이고, 꿈의 조건이었다. “물을 보는 것만으로는 물의 절대적인 모성, 생명의 최초의 환경임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꿈꾸지 않으면 안 된다.” 지적 깨달음, 감정적 몰입, 영적인 여정 그 어떤 것도 보는 행위와 무관하지 않다.⑴
시지각의 이토록 존재적이고 입체적인 특성을 인상주의자들의 빛 해석을 과소평가하는 근거로 이해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 반대다. 예컨대 모네는 빛이 어떻게 자연과의 조화를 중시하고, 사물이 자율적인 존재가 아니며, 빛이 환희의 감정을 즉각적으로 일으키는가를 보여주었다. 권대훈은 당분간 렘브란트의 것보다는 인상주의자들의 시각적인 빛을 더 즐기는 것 같다. 대상과 빛 사이에서 일어나는 시지각적 티키타카를 즐거이 탐미한다. 그러니 이 세계에 등장하는 빛에 별스러운 주석을 다느라 너무 힘을 뺄 필요는 없다. 먼저 빛과 대상이 벌이는 게임을 즐기자. 빛이 인물상의 좌측 상단부를 때릴 때, 실제와 이미지의 첫 번째 착시가 야기되고, 우측 하단의 그림자에서 두 번째 착시가 일어난다. 이 이중의 착시는 서로 배척하지 않는 실재와 이미지의 놀이의 산물이다.
포용적 조각의 발판 마련하기
권대훈은 기억과 현재, 빛과 그림자, 실재와 가상, 조각과 회화의 경계를 두루 넘나든다. 기억은 그의 숙련된 손끝에서 육화(肉化)된다. 육화된 기억 위에서 이번에는 빛의 육화가 일어난다. 이중의 육화, 이것이 이 세계의 시각적 감성을 조율, 연출하는 조형적 문법이다. 이로부터 복수(複數)의 서사가 기지개를 켜며 몸을 일으킨다.
포스트모던 계열의 ‘탈(脫)’이나 ‘해체’ 담론들과는 상반된 미(美)의 역학이다. 이 세계는 경계를 포용하고 유희한다. 기억과 현재, 실재와 이미지 사이의 줄타기, 회화와 조각, 드로잉과 소조는 서로의 보호자가 된다. 조각은 회화를 포용하고, 회화는 조각의 확장에 기여한다. 윈-윈(win-win)이다. 2차원, 3차원 운운하는 장르 적대주의는 모더니즘의 터무니 없는 발명품일 뿐이다. 왜 그 유산을 대물림하는가. 권대훈은 사물과 빛. 실재와 이미지의 어느 하나에 매몰되거나 집착하지 않는다. 빛의 의미를 강조하려 물질의 하찮음에 밑줄을 그을 필요는 없다. 여기서 빛은 제임스 터렐(James Turrel)의 빛과 클로드 모네(Claude Monet)의 빛, 댄 플래빈(Dan Flavin)의 미니멀한 빛 가운데 하나를 택일하지 않아도 된다. 어느 하나가 정(正)이고, 다른 것들이 위(僞)로 판명될 필요는 없다. 이것이 이 포용적인 세계의 본질이다.
마르셀 뒤샹과 개념주의 미학, 둘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는 기조가 남긴 폐해를 잊어서는 안 된다. 실재에 다가서기 위해 눈을 가리고, 땀이나 노동 따위는 단두대로 보내야 한다는, 한때는 꽤나 유효해 보였던 오류를 되풀이해선 곤란하다. 서구의 고대 철학에 기대어 구상(具象)을 추잡한 거짓으로 단죄했던 추상 미학이나 그 반대쪽의 동일한 편협함도 같은 맥락이다. 그 결과는? 알다시피 충분히 끔찍했다. 미켈란젤로는 돌로 다비드상을 만들었지만, 오늘날 LA 미술관은 우리에게 340 톤의 돌을 있는 그대로 제시하거나 쪼그려 앉아 대변을 보는 여경(女警)의 조각상을 제시한다. 탈과 해체의 담론들이 인식을 더 첨예하게 만들었던가? 그 반대다.
경계를 해체하자 미적 상대주의(aesthetic relativism)가 만연하게 되었다. 탈경계는 탈-기준, 탈-미학, 탈-예술로 거침없이 내달렸다. 이미지의 생명력을 상실하기에 이르기까지. 경계는 의미의 출처다. 의미를 때려 부수는 것이 아니라 재구성하는 것이 예술에 주어진 소임이다. 경계가 문제라고? 잘못 설정된 경계가 문제일 뿐이다. 눈과 개념, 조각과 회화는 둘 중 하나를 부정함으로써가 아니라, 각각의 고유한 개별성을 더 성찰하고 엮어냄으로써 완성된다. 새로움의 탐구와 실험은 변함없이 예술의 운명이지만, 더는 오해하지 말자. 부정과 파괴, 해체는 새로움이 아니라 구태로 물러나는 길일 뿐이다. 의미를 더 풍요롭게 함으로써 획득되는 새로움은 여전히 가능하며, 이것이야말로 예술의 미래가 되어야 한다.
시각예술은 이 세계에는 부재하는, 최상의 탁월성의 기준을 시지각적으로 제시하는 통로였다. 영감, 먼 곳에서 오는 빛, 숭고함, 은총..., 사적 견해의 차원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높은 수준을 향하는 힘인 백터(vector), 그것이 시각예술이었다. 하지만 탈과 해체의 쓰나미가 휩쓸고 간 오늘날 예술은 시니피에-시니피앙의 의미 고리 파괴하기, 실재를 혼돈의 기호들과 뒤섞기, 이미지를 뿌리 없는 사생아로 만들기의 아수라장이 되었다. 어리석음, 관점의 부재, 자의적인 추함의 전도사가 되었다.
권대훈의 조각은 조각을 재사유하는 것에 대한 천명이다. 조각의 전통과 비전통을 동시에 포용함으로써, 조각과 비조각을 하나로 엮음으로써 조각을 구한다. 실재와 이미지, 진실과 허구 둘 중 어느 하나도 부정되거나 해체되어야 할 것으로 인식하지 않기, 모든 비조각적인 것들에 대한 적대주의를 내려놓기로서의 조각이다. 허구를 진실 확장의 기제로 전용하는 것, 이미지를 수렁에서 구해내는 것, 즉 모더니즘의 독(毒)이 해독된 조형성에 다가서기, 이것이 권대훈 작업의 방향이자 의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