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행일록 - 서해바다로 나라 곡식을 옮기다

조행일록 - 서해바다로 나라 곡식을 옮기다

분야
전시
기간
2024.07.30.~2024.10.27.
시간
화-금 09:00-18:00 / 토 5월-8월 09:00-21:00, 9월-4월 09:00-19:00 / 일, 공휴일 09:00-19:00 / 월요일 휴관
장소
부산 | 국립해양박물관
요금
무료
문의
국립해양박물관 051-309-1900
바로가기
https://www.mmk.or.kr/?folder=exhibition&page=view&idx=79&cate=now_upcoming

전시소개

조행일록, 서해 바다로 나라 곡식을 옮기다

JOHAENGILROK: The Grain Odyssey to the West Sea


조운(漕運)은 세금으로 걷은 곡식 등을 서울까지 배로 운반하는 일을 말하며, 나라 살림을 꾸려 나가는 데 매우 중요했습니다.

임교진이 함열현감으로 임명되었던 19세기에는 조창(漕倉(세곡 창고))이 속한 지역의 관리가 조세를 걷고, 운반하는 책임까지 함께 맡았습니다.

성당창(聖堂倉)은 함열현에 있던 세곡 창고로 금강 일대 여덟 고을의 세곡을 모으는 곳이었습니다.

임교진은 1863년 세곡으로 거둔 쌀과 콩 1만 3천여 석을 열두 척의 배에 나눠 싣고 한양 경창까지 무사히 운송합니다.

그는 조운의 모든 과정을 꼼꼼히 일기로 남겼는데, 이는 바로 『조행일록(漕行日錄)』으로 현재까지 남겨진 가장 오래되고 소중한 기록입니다.

임교진이 남긴 일기를 통해 당시 사람들의 노정과 바닷길을 찬찬히 되짚어 보는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


1부

나라 곡식을 거두는 일은 나랏일 가운데 가장 중요했습니다.

조선 전기에는 경차관(敬差官), 해운판관(海運判官) 등 중앙정부의 관리가 파견되어 조운을 감독했습니다.

하지만 조선 후기부터는 점차 지방관리들이 행정과 조운을 겸직하는 형태로 바뀌었고, 19세기에 들어서면 조창(세곡 창고)을 관할하는 지방관이 세곡을 거둬서 납부하는 임무까지 맡게 되었습니다.

조창이 있는 마을에는 나라에서 운영하는 조운선을 관리하고, 세곡을 싣는 일을 맡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임교진이 조운을 맡았던 1863년, 성당창에는 열두 척의 조운선이 있어야 했지만,

새로 건조한 배를 포함해 열 척 밖에 없었습니다. 조운을 차질 없이 진행하기 위해 모자란 배는 민간에서 운영하는 배를 빌려 세곡을 옮겨야 했습니다.


2부

성당창 조운선 열두 척은 이틀 만에 금강을 따라 서해 앞바다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임교진은 한양으로 가는 도중 여러 차례 제사를 지냈습니다.

큰 바다로 나가기 전, 바다신인 "해약(海若)"에게 지낸 제사에는 본인이 직접 축문을 쓰고 검은 돼지를 제물로 바치기도 했습니다.

서해를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남쪽에서 부는 바람이 간절했으며, 물때와 바람을 맞추기 위해 선원들은 운항을 마칠 때까지 배에서 내리지 못했습니다.

조운선단은 서해 항해 도중 두 번의 큰 위기를 맞았지만, 임교진은 세곡을 모두 안전하게 운반하기 위해 여러 노력을 기울입니다.

서해를 따라 경강(京江, 한강)까지, 임교진과 조운선단이 나아간 25일간의 항해를 함께 지켜봐 주시기를 바랍니다.


3부

드디어 도착한 경강(한강)! 하지만 강 항해는 바다 항해만큼 만만치 않았습니다.

서해로 흐르는 강들은 물때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 밀물이 들어와야 조운선과 같은 큰 선박이 지나갈 수 있을 만큼의 수심이 확보되었습니다.

게다가 바람이 제때 불어주지 않으면 선원들이 모두 힘겹게 노를 저어야 겨우 배를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임교진과 조운선 열두 척은 무사히 광흥창에 도착해 세곡을 납부할 수 있었을까요? 고단했던 경강 운항을 함께 지켜봐 주시기를 바랍니다.


에필로그

1863년 6월

무사히 조운을 마친 임교진은 몸이 불편했지만 아들과 함께 부친, 증조부 묘소를 참배하고 함열현에 돌아옵니다.

1년 뒤 임교진은 조운을 한 차례 더 무사히 마친 후 공적을 인정받아 익산군수로 승진했지만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납니다.


1875년 3월

함열현감 조희백은 임교진이 갔던 물길을 따라 한양까지 세곡을 옮기며 <을해조행록>이라는 일기를 남깁니다.

임교진과 사돈지간이었던 조희백은 <조행일록>을 알고 있었을까요?

고려시대부터 900여년간 이어져 왔던 난행(難行)은 1895년(고종 32)을 마지막으로 마침표를 찍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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