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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일
- 2007.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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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의 마지막 날. 한참 업무 마무리 정리와 인수인계로 바쁜 김명곤 문화관광부 장관을 만났다. 지난 19일 문화관광부 장관을 포함한 개각발표로 장관직에서 물러나 다시 ‘예술인 김명곤’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는 그였다. 무엇이든 ‘끝’이라는 것은 아쉬움이 남기 마련. 그럼에도 ‘세기에 남는 불후의 명작’을 만드는 것이 인생의 꿈이라는 그의 포부는 아쉬움 대신 또 다른 ‘기대’를 품게 했다.
'장관직'은 인생의 큰 추억, 고향으로 돌아가는 심정
임기가 얼마 남지 않았던 까닭일까. 김명곤 장관의 표정은 어깨춤을 덩실거리며 진도아리랑을 부르던 ‘서편제’의 유봉처럼 시종일관 소탈하고 가벼워보였다. 장관이기에 앞서 ‘예술인’으로 많은 이들의 머릿속에 각인된 탓인지, 사실 ‘공무원’의 양복보다는 ‘유봉’의 한복이 유난히 더 어울리는 그였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심정이야. 문화관광부에서 했던 일은 보람 있었고 인생의 큰 추억이 될 것 같아.”
지난해 3월 27일 취임했으니 1년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장관직을 맡았던 셈이다. 주마등처럼 흘러간 1년이 그에게는 어떤 의미로 남아있을까? 가장 힘들었던 일로 ‘바다이야기’ 사건을 꼽는 그는, 그 일로 “평생 먹을 욕을 다 먹었다”며 웃어보였다. 장관의 표현에 따르자면 ‘폭풍’과 ‘해일’이 불어 닥쳤던 시기였다고. 하지만 잘 이겨냈다. 그는 “어려운 일도 바다이야기 사건이었지만 보람 있는 일도 바다이야기 사건이었다”며 “갈등이 잘 해결된 성공적인 사례”라고 했다.
또 그가 무엇보다 보람을 많이 느꼈던 일은 전통예술팀을 신설해 전통예술 진흥정책을 발표하고 전통문화의 세계화 전략인 한 브랜드 육성을 위한 ‘한 스타일’ 사업을 시작한 일. 아직 ‘한 스타일’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 아쉽다고 하자 김명곤 장관은 “아직은 예산도 부족하고 정책개발도 미약한 단계에 있지만 ‘출발’했다는 데에 큰 의미가 있다”고 답했다. 또 “앞으로 전 국가적인 산업으로 크게 키워나갔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피력하기도 했다.
‘한글’, ‘한식’, ‘한복’, ‘한옥’, ‘한지’, ‘한국음악’으로 대표되는 ‘한 스타일’ 중 특별히 애착이 더 가는 분야가 있냐는 질문에는 ‘허허’ 웃는다. 그에게는 우문이었던 셈이다. 문화관광부 장관에게 어찌 그 애착에 차등이 있을까.
“한글서부터 한옥, 한식, 한복 등 다 애착이 가지, 한국음악도 그렇고”
그래도 서편제의 ‘소리꾼’이 아니던가. “한국음악, 어떻게 다가가면 좋을까요?”라는 질문을 던지자 “민요라던가, 다른 장르와 접목된 국악과 같이 접근이 쉬운 국악부터 들어보라”고 그가 제안했다. 덧붙여 판소리의 매력을 묻자 눈동자가 반짝인다.
“판소리는 한 인간이 표현할 수 있는 성악의 최고 극치야. 사람 목소리뿐만 아니라 천지자연의 소리, 귀신의 소리도 묘사하지. 한 사람이 노래와 연기, 이야기까지 함께 해나가는 예술의 총화가 바로 판소리지.”
천생 ‘예술인’의 혼을 타고난 사람의 눈빛이었다.
내 지난 젊은 날은 ‘질풍노도의 시기’
20대의 ‘청년 김명곤’은 과연 어떠했을까?
“연극과 판소리에 완전히 빠져들었던 시기였어. 그야말로 미친 듯한 시절을 보냈고. 괴테의 말을 빌리자면 ‘질풍노도의 시기’가 바로 그 때라고 할 수 있지. 폭풍이 불고 무서운 파도가 밀어닥치는 듯한……”
그의 대학 시절은 말 그대로 열정으로 가득 찬 시기였다. ‘미친 듯’ 연극과 판소리에 빠져있느라 미팅 한 번 못해본 게 아쉽다며 웃는 김명곤 장관. 축제 또한 공연준비에 바빠 제대로 즐겨보지 못했단다. 특별한 대학시절을 보낸 탓에 평범한 대학생활을 하지 못한 것. 그래서 다시 대학생이 된다면 여행도 하고 싶고 미팅도 하고 싶다고 말한다.
“연애도 제대로 못했어. 혼자 마음속으로 좋아하는 열정은 있었지만. 커피를 마시거나 놀러간다던가 하질 못했어. 쉴 새 없이 연습하고 공연만 했지.”
여행도 미팅도 하지 못했던 대학생활이었지만 당시의 경험은 그의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됐고 지금의 자리까지 올 수 있는 자양분이 되었다. 어쩌다 ‘그 세계’로 빠져든 걸까? 그의 대답이 재미있다.
“그건 나도 몰라, 왜 그랬는지 설명하기 어렵지. 내 마음의 본능이었을까?”
사랑에 빠지는데 이유가 없듯 그는 자신이 선택한 예술의 길 또한 이유가 없었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그는 확신한다. ‘꿈’이 있었기에 모두 가능했던 일이라고. ‘언젠가는 최고의 명작을 만들겠다, 최고의 경지에 오르겠다’는 꿈을 그는 늘 품고 있었다. 장관을 지낸 지금도 그의 꿈은 여전히 건재하다. 한국예술을 세계 속에 빛나게 하겠다는 꿈, 고전의 반열에 몇 작품이라도 남겨보겠다는 꿈. 그는 말한다. 꿈은 마치 여의주와 같은 것이라고. 퇴색되지 않도록 갈고 닦는 것이 중요하다고.
“어떤 명창을 돌아가시기 전에 만났어. 그 분이 말씀하시기를 스무 살 무렵에는 판소리 명창이 되겠다는 전봇대 같은 꿈이 있었다는 거야. 근데 죽을 때쯤 되니까 이쑤시개만큼도 못 이뤘다는 생각이 들더래. 그게 판소리의 세계라는 거지. 그 얘길 듣고 감동 받았어.”
그는 말한다. 이쑤시개만큼이라도 이루려면 전봇대만큼 큰 꿈을 꾸라고. 마음껏 상상하고 마음껏 방황할 수 있는 최고의 기회, 자기 영혼의 지하수를 찾아 그걸 뽑아낸다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시기. 그것이 그가 젊은이들에게 말하고 싶은 ‘청춘’이고 ‘젊음’이었다.
책, 영화, 음악 그리고 ‘아버지’
김명곤 장관도 고등학생 아들과 대학생 딸을 둔 평범한 아버지이다. 딸과의 이야기도 잘 통하고 특별히 ‘세대차이’도 느끼지 못할 만큼 다정다감한 아버지. 그래도 딱 한번, ‘세대차이’를 느낀 적이 있긴 하다.
“고2 된 아들이 휴대폰 문자를 보내 길래 ‘여자친구냐?’했더니 ‘그냥 친구에요’ 하는 거야. ‘여자면 여자라고 하지 왜 거짓말을 하냐’했더니 ‘사귀지 않기 때문에 그냥 친구’라는 거야. 알고 보니 요즘 ‘여자친구’라는 말이 특별히 사귀는 사람을 가리킬 때 하는 말이더라고. 딸 에게 그 이야길 하니 그게 세대차이라네.(웃음)”
그의 여가시간은 평소보다 더욱 더 바쁘다. 취미로 하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서예도 하고 명상훈련도 하고, 또 그간 못 본 영화나 책도 본다. 인터넷은 수시로 하고 요즘 화제인 ‘UCC’ 동영상은 관심을 가지고 가끔 보는 정도.
그에게 책을 추천해달라고 하자 그는 ‘사막에 숲이 있다’라는 책을 기다렸다는 듯이 소개했다. 중국의 한 여인이 사막의 노총각에게 시집보내져 허허벌판 사막에 살다가 외로움을 견디기 위해 나무를 심기 시작했는데 20년 후 하나의 ‘숲’을 만들어냈다는 이야기다. 꿈 하나로 기적 같은 일을 만들어 낸 것.
그는 울적할 때면 주로 혼자 비디오를 빌려 영화를 많이 보는 편이다. 예전에는 노래하는 것으로 울적함을 많이 달랬단다. 바빠서 봄나들이도 나서지 못했다는 그는 지리산 쌍계사와 섬진강 근처를 나들이 장소로 추천했다. 순간 쌍계사 아름드리 벚꽃나무 아래서 걸쭉하게 남도가락을 뽑아내는 그의 모습이 연상됐던 것은 왜 일까.
나는 광대!(廣大), 창조력으로 살아가는 삶
“내가 좋아하는 말이 ‘광대’라는 말이야. 어릿광대의 그 광대가 아니라. 넓을 광(廣) 큰 대(大). 넓고 큰 영혼으로 세계와 맞서 자신의 창조력으로 표현해내는 그런 사람.”
김명곤식 ‘광대’ 해석법이다. 자기 분야에 있어 넓고 큰 영혼으로 창조력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바로 광대라는 것. 광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창조력이다. 그는 미래 사회를 위해 제일 필요한 인재가 바로 ‘창의성’이 풍부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뮤지컬 대본도 구상하고 있고 영화 시나리오도 구상하고 있다는 그에게 창작력의 원동력을 물었다.
“뭔가를 표현해고자 하는 일종의 갈증이 있어. 늘 창조를 한다는 것, 영화든 연극이든 새로운 것을 표현한다는 것에 대해 언제나 갈증이 있어. 그게 곧 살아가는데 있어 큰 에너지고 되는 것이고.”
장관직을 수행하면서 어떻게 그 ‘갈증’을 참았냐고 물었다. ‘광대’ 김명곤 장관에게 그 질문 역시 ‘우문’이었다.
“작품을 만드는 것도, 정책을 만드는 것도 모두 창작이야, 어떤 일을 맡게 되더라도 그 속에 열정을 불어넣고 또 창조적인 아이디어를 찾아내면 그게 창작인거지. 예술가만 창작을 하는 게 아니야. 하하”
교사부터 배우에 연출가, 국립극장장, 그리고 장관까지. 그의 삶을 ‘연극’으로 비유하자면 참 다양한 배역을 맡았던 김명곤 장관. 가장 자신에게 맞았던 배역이 무엇이냐고 묻자 “그 배역 모두 나에게 맞는 것 같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늘 꿈을 가지고 생활하다보면 그 꿈을 이루기 위해 해야 할 일들이 굉장히 많다는 것. 그 모든 배역들이 자신을 키우는 데 필요했던 배역들이었다고. 한 가지만 파고든다고 ‘광대’가 되는 것이 아닌 셈이다.
그는 20살 때 세운 꿈을 간직하고 있다. 바로 괴테의 파우스트와 같은 불후의 명작을 남기고 싶다는 꿈이다. 60년의 시간을 갈고 닦아 전설과 신화, 민속, 음악, 그리스 문명에 이르기까지 커다란 정신문명을 담아놓은 파우스트와 같은 작품을 내놓고 싶다고 말한다. 그는 역시 ‘광대’였다.
“한 작품을 명작이다 아니다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해. 당대에 인정받지 못하고 나중에야 불후의 명작이 되듯 말이야. 꼭 당대에 인정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은 없고 그걸 위해서 평생 탐구하고 노력하며 살다 가면 되는 거지. 그걸로 만족해.”
문화관광부 대학생 기자
김보빈(성신여대 경제)
유승혜(광운대 국어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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