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인터뷰 2] 김장실 종무실장
게시일
2007.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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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대.기 연속인터뷰 2] 김장실 종무실장

 

  문화관광부 ‘종무실’이라는 생소한 곳에서 ‘실장님’과 인터뷰를 해야 한다는 부담과 긴장감을 안고 있던 기자에게, 김장실 종무실장은 “만나서 반갑습니다. 봄기운 같은 젊음의 풋풋함이 느껴져서 참 좋네요.”라는 말을 건네며 정답게 맞았다.


  문화관광부 대학생 기자단을 위해 바쁜 업무를 뒤로 하고 인터뷰에 임해준 김장실 종무실장, 그와의 따스했던 인터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와 ‘현재’ 이야기를 나누다


“종교콘텐츠는 한국형 정신문화의 보석”


  종무실이 무엇을 하는 부서인지 묻자 “종무실은 우리나라 종교와 관련된 정책업무를 하는 곳”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다(多) 종교사회인 한국은 국민의 반 이상이 종교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많은 국민들을 대상으로 ‘종교’관련 미묘한 업무를 다루어야 하는 부서인 만큼 종무실장으로서 느끼는 책임감이 막중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종무실의 대표적인 업무를 꼽자면, 종교 간의 다툼이 일어나지 않도록 화합을 주도하는 것, 종교유산들을 국가문화재로 지정해 유지 보존될 수 있도록 하는 것, 마지막으로 종교별 연대조직을 형성해 국제적인 종교연합조직 활동을 지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사무엘 헌팅턴은 냉전체제 이후 국제정세에서 가장 중요한 사안은 문명충돌이며 그 중 종교 갈등이 핵심적이라고 지적하기도 했죠. 종무실은 바로 그런 중요한 일을 수행하는 곳입니다.”


  그가 언급한 종교간 갈등은 분명 현실적인 문제다. 레바논, 이스라엘 등지에서 일어난 내전은 종교 간 극심한 분열과 갈등이 얼마나 파괴적인지를 잘 보여준다. 하지만 외국 종교문제와는 달리 우리나라 종교 갈등은 심각한 수준이 아니라는 점에서 우리나라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종교문제가 무엇인지 의문이 들었다.


  “외국에 비하면 우리나라는 종교 갈등이 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양한 종교 간에는 소소한 갈등이 잠재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이 현실화되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려하고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게다가 현재 사이비종교의 수가 많아져 개인의 신체나 가정의 화목을 망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건전한 종교 활동을 하도록 조성하는 것도 중요한 문제이죠. 무엇보다 종무실장으로서 제가 가장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종교 콘텐츠입니다.”


  그는 우리나라가 콘텐츠 강국이 되어야한다고 강조했다. “경제 가치 생산에 콘텐츠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며 “현재 우리나라에는 종교와 관련된 콘텐츠가 숱하게 존재하지만 이것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고 안타까워했다.


  “우리나라에서 근대화 이전에 존재하던 무수한 종교들의 상당수가 사라져버렸고, 경전이나 의식이 알려지지 않은 채 매일매일 멸실되어 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종교설화나 일화, 종교시설, 예식, 의복 그리고 종교인 자체가 바로 중요한 종교 콘텐츠입니다. 이를 보호하고, 각 종교의 원천콘텐츠를 발굴해서 정리하고 작품으로 가공하여 세계적으로 유통시켜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종교인으로서 개인수련을 하는 사람들을 찾아내 각 분야에 몰두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며 “이를 국민들의 심신수련활동, 안무소재, 미술소재 등 문화산업적으로 충분히 응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물론 종교콘텐츠 발굴과 정리 작업은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어려운 작업입니다. 하지만 이를 통해 한국형 정신문화의 보석이 만들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템플스테이 사업, 최고의 문화상품이자 한류”


  한국정신문화를 세계에 알리기 위해서 종교콘텐츠의 보호와 발굴이 시급하다고 강조한 그는 현재 종무실에서 시행하고 있는 템플스테이 사업이야말로 그러한 시도의 일환이라고 덧붙였다. 지난 2002년 월드컵을 계기로 한국의 고유문화를 알리고자 하는 차원에서 실시되었던 ‘템플스테이 사업’은 당시에 외국인으로부터 크게 호평 받은 전통사찰 체험프로그램. 그는 “템플스테이 사업에 앞으로 3년 동안 600억 가까이 되는 많은 예산을 투입해 크게 실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템플스테이를 직접 체험한 사람들, 특히 외국인들은 동양적 신비감과 한국문화의 정수를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며 굉장히 흡족해했습니다. 몇 년간 이 사업을 시행하면서 템플스테이를 통해 외국인들은 한국의 선(禪) 문화를 체험하고 내국인들은 건전한 여가문화를 즐길 수 있기 때문에 최고의 문화상품이라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불교문화를 많이 접했다고 말한 그는 사찰문화에 대한 그때의 경험이 아직도 인상 깊게 남아있다며 템플스테이 사업이 국가이미지를 제고하고 한국관광 진흥에 크게 이바지할 것이라고 보았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불교문화가 우리나라의 대표 관광 상품으로서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 걸까?


  “한국 불교문화는 음식, 의복, 의식, 수행방법 등이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북한과 일본에 전파된 전통불교문화는 원형을 보존하지 못한 채 많이 파괴된 것과 비교가 될 정도지요. 이것이 한국불교문화의 가장 큰 장점이죠. 현재 한국영화, 드라마, 가요 등 대중문화가 ‘한류’라는 이름으로 전파되고 있습니다. 저는 외국인들이 한국의 정신문화를 접하여 이것을 배우고자 할 정도로 동경하면서 한국식 사유체계를 갖게 되는 것을 한류의 최고봉이라고 생각합니다. 템플스테이 사업이 그러한 한류를 가능하게 만들 것입니다.”


다양성과 차이를 존중하고, 나의 신앙보다 타인의 신앙을 더 중요하게 여겨야


  앞서 불교문화에 익숙하다고 밝혔듯이 그의 종교는 불교다.


  “어릴 때 어머니 손에 이끌려 경남 남해군 상주면 금산 보리암에 다녔던 것이 시작이었죠.”


  이후 고교 때 불교학생회 회원으로 활동했고, 대학교 때 사찰에서 고시공부를, 하와이 대학원 시절 3년 동안 그 지역에 있던 대원사에 가끔씩 다녔다는 그는 현재 특정한 사찰에는 다니지 않는다. 대신 불교의 진언수행과 법화경 사경을 꾸준히 하고 있다고 했다.


  “진언수행은 불교의 특정한 경전에 있는 말씀 하나를 취해 매일 반복해서 암송하는 것을 말합니다. 깨달음을 얻는 수행방편 중 하나죠. 저의 진언은 ‘옴마니 반메훔’입니다. 매일 30분씩 암송하는 것이 햇수로 3년째입니다. 사경은 불교의 경전 내용을 베껴 쓰는 것입니다. 저는 작년 2월부터 ‘법화경’이라는 경전을 하루에 반쪽씩 베껴 써왔습니다.”


  지금은 한글로 된 법화경을 플러스 펜으로 대학노트에 베껴 쓰지만 나중에는 꼭 한문으로 된 법화경을 베껴 쓸 것이라는 각오를 내비친 그는 종무는 여러 종교를 다루는 것이기 때문에 개인적인 신앙이 있더라도 나의 신앙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남의 신앙이라고 생각하며 존중해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매년 10월경에 종교문화축제가 열립니다. 작년에 참여했는데 종교지도자와 평신도, 일반시민이 참여해서 즐기는 모습이 보기 좋았습니다. 특히 가톨릭 주교가 승복을, 스님이 가톨릭 성복을 입는 등 7대 종단 종교인들이 ‘종교의복 바꿔 입어보기’를 했는데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또한 새터민과 이주노동자들을 위한 공연이 마련되어 그들과 어울릴 수 있었던 기회가 소중했다고 한다. 이런 행사를 통해 관용의 미덕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는 것.


  “제대로 된 사회는 다양성과 차이를 존중하는 사회입니다. 우리 사회는 같은 것을 강요하는, 동일화의 강요가 많은 사회지요. 하지만 이런 종교행사를 통해 다름을 존중하는 사회로 조금씩 바뀌게 되기를 바랍니다. 나의 신앙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신앙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싹튼다면 사회화합, 나아가서는 민족통일까지 가능할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김장실 종무실장 


그와 ‘과거’의 이야기를 나누다


가난, 공부, 그리고 어머니


  종무업무와 관련된 인터뷰를 진행하는 도중에 문득 종무실장의 학창시절이 궁금해졌다.


  “저는 경상남도 남해가 고향입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자 집에서 중학교에 가지 말라고 할 정도로 집이 가난했어요. 고등학교는 다니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중학교에 입학했죠. 그러나 중학교 3학년이 되자 고등학교를 무척 다니고 싶어졌습니다. 다른 친구들은 학원에서 공부했지만, 저는 돈이 없어서 학원은커녕 방 1칸에 일곱 식구가 같이 지내기 때문에 공부할 공간조차 없었죠.”


  고위직 공무원으로서 인생의 탄탄대로를 걸었을 것이라고 예상했던 것과 달리 힘든 학창시절을 보냈다는 그의 답변은, 솔직히 신선한 충격이었다.


  경남공고를 갔다가 내 길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진로를 바꿔 영남대 행정학과, 서울대 행정대학원에 입학해 공부했다고 한다. 처음 상경했을 때 자신의 서울생활을 도와줄 이종사촌을 만나기 위해 을지로에서 한참 헤맸다는 그는 “아직도 어머니가 해주신 이불보따리를 안고서 한참을 헤맸던 그 때가 선명하게 생각난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이종사촌도 가난한 살림이었기 때문에 신림동 고시원에 들어갔다가 3만원이 없어 중학교 동기의 친누나 집에 얹혀살았다는 그는, 그분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전했다. 그 외에도 그는 자신을 많이 도와준 사람들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고 한다.


  “중학교 3학년 때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공부했는데, 당시에 자신의 집에 가서 같이 공부하자고 했던 ‘고상민’ 선배도 고마운 사람 중의 한 명입니다. 그분과 몇 달간 함께했던 공부가 합격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또 경남공고를 다닐 때 저는 집안 살림이 어려워 점심을 굶었습니다. 그런 나를 위해 매일 도시락을 싸주던 ‘전호종’친구도 너무나 고마웠습니다. 아직도 이 두 사람과는 연락을 하고 지내지요.”


  그럼 그의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멘토는 누구일까?


  “많은 위대한 분들을 뵈었지만, 저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분은 바로 어머니입니다. 고생도 많이 하셨던 분이죠. 서로 긴밀한 일로 상의하기도 하고, 함께 얘기하다가 눈물도 흘리면서 모자관계보다는 동지적 관계에 가까웠을 만큼 돈독한 정을 주고받았습니다.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희망과 노력을 안고 한평생 사시며 따뜻한 마음을 잊지 않으셨던 어머니를 저는 가장 존경합니다.”


잊을 수 없는 청와대와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의 기억


  미국 하와이대 유학생활, 총무처 수습행정관, 문화공보부 사무관, 대통령 사정비서관실 행정관, 문화관광부 예술국장, 한국예술종합학교 사무국장, 국무조정실 교육문화심의관. 그가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거쳐 온 자리들이다. 여러 부서 요직에서 활동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부서나 업무와 관련된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부탁했다.


  “청와대에서 10년간 근무했는데 새벽별보며 들어가 밤 12시가 넘을 때까지 일했습니다. 군부체제가 민주화체제로 변화하는 것을 직접 관찰할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미국 하와이대학으로 유학을 가서 ‘군사체제와 민주화’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죠.”


  더불어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사무국장으로 근무했던 것도 기억에 오래 남아있다고 한다.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들은 세계적인 실력을 겸비한 훌륭한 사람들입니다. 또한 일찍부터 영재성을 발견하여 자신의 길을 선택한 아이들이 교육을 통해 자신의 실력을 일찍 꽃피우는 것을 보면서 참 뿌듯했습니다. 놀라기도 했고요.”


  과학기술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 다른 영역의 영재들을 교육시키는 것도 중요하다면서 외국에 있는 예술영재들이 우리나라로 와서 한국교육을 받으려고 할 정도의 예술영재 교육과 시설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혹시 예술영재들 중에 기억에 남는 학생이 있느냐는 질문에 그는 ‘손여름’과 ‘하은지’ 학생을 꼽았다. 고등학교 과정을 생략하고 한국예술종합학교에 바로 입학한 두 학생은 각각 피아노 연주와 무용으로 국제유명콩쿠르에 입상하는 등 세계적으로 능력을 인정받고 있는 재원들이다. “착실하게 세계적인 예술가로 크고 있다는 소식을 접할 때마다 뿌듯하다”고 밝힌 그는 “다양한 분야의 인재들을 격려하고 지원해주는 환경이 마련된다면 한국은 인재강국으로 성장할 수 있고 선진강국으로 부상할 수 있을 것”이라고도 했다. 


그와 ‘미래’의 이야기를 나누다


시대와 삶을 관통하는 대중가요


  ‘평소 어떤 분야에 관심을 두었냐?’는 질문에 ‘어렸을 때부터 트로트 부르는 걸 좋아했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트로트를 비롯한 한국 대중가요를 접하면서 그것들이 어떠한 정치사회적인 배경 속에서 대중의 사랑을 받아왔는지를 연구해보고 싶었고, 그것에 대해 현재 글을 쓰고 있는 중이라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미소의 뜻이 궁금해 집요하게 묻는 기자에게 그는, 조만간 출판사 관계자와 만나보고 가능하면 금년 중에 ‘한국 대중가요의 정치사회학(가제)’이라는 책을 낼 것이라고 밝혔다. 자신의 글을 소개해주겠다면서 시대별로 어떤 대중가요가 유행했는지를 설명해주는 그의 표정이 무척 즐거워보였다.


  “나라 잃은 1920년대에는 ‘황성옛터’와 같이 나라 잃은 설움을 토로하던 노래가 유행했습니다. 30년대는 만주와 관련해서 ‘꽃 서울’ 같은 노래가 유행했고, 40년대 광복시기에는 해방 기풍을 노래한 ‘귀국선’이, 50년대에는 전쟁과 이산가족의 슬픔을 표현한 ‘이별의 부산정거장’이 인기였습니다. 60년대에는 경제개발에 따라 계층상승욕구가 높아지자 그런 시대분위기를 반영한 ‘회전의자’가 유행했지요.”


  평소 시와 소설 해석과 감상을 즐기는 그는, 인터뷰 중간 중간에 여러 대중가요 한 소절씩을 부르며 상당한 수준의 노래실력도 보여줬다. 책을 낼 때 자신이 직접 부른 가요들이 수록된 CD를 포함시킬 계획이라고 한다. 애창곡을 묻자 세월이 지나면서 ‘하룻밤 풋사랑’, ‘목포는 항구다’, ‘여자의 꿈’, ‘옥이엄마’, ‘첫눈 내린 거리’ 등으로 바뀌었다면서 ‘18번을 통해 본 나의 개인사’라는 글도 쓸 예정이라고 귀띔해주었다.


  하나같이 처음 들어보는 노래제목이라는 말에 인터뷰가 끝나고 조금씩 불러주겠다며 흔쾌히 제안하는 그. 그런 모습에서 이웃집 아저씨와 같은 친숙함을 느꼈다. 앞으로 대중가요를 주제로 한 재미있는 책을 꼭 내고 싶다는 그의 바람이 좋은 결실을 맺기를 바란다.


나의 인재론 - 꿈, 노력, 열정이라는 3박자의 조화


  그가 생각하는 인재는 어떤 사람일까?


  “국내에서 1등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던 것이 과거였다면 이제는 세계 1등이 되어야 하는 시대입니다. 세상을 보는 시공간적 안목이 넓어져야 합니다. 자신이 소속된 집단, 국가를 뛰어넘어야 하고 과거, 현재, 미래를 아우를 수 있도록 사고해야 합니다.”


  안목을 갖춘 사람만이 인재일까. 그는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아무리 재주가 있는 사람이라도 노력하지 않으면 성공하지 못하는 것을 숱하게 봐왔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소질과 관심을 파악해 목표를 설정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드릴’에 비유했다.


  “구멍 뚫는 드릴이 너무 크면 제대로 파지 못합니다. 드릴이 좁아야 구멍을 잘 뚫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자신의 능력과 소질, 관심을 파악하여 한 분야를 깊이 파고들어가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확실한 목표와 집중력이 뒷받침되어야 인재가 될 수 있습니다.”


  인재가 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노력이 가장 중요하지만, 어떠한 방향으로 노력할 것인지를 정하기 위해 꿈과 이상을 정해야 하고, 노력이 지속될 수 있도록 열정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그는 ‘높은 이상, 끊임없는 노력, 열정’이 인재가 갖출 3요소라고 강조했다.


  “제가 처음 영어공부를 시작했을 때, 저는 가장 못하는 반에 있었고 반에서도 가장 형편없었습니다. 하지만 매일 3시간 씩 영어공부를 꾸준히 하고 영화대사를 통째로 암기했으며, 매일 주변사람들에게 ‘내가 하버드대학에서 공부하는 모습을 상상하라’고 공표했죠. 꿈과 노력과 열정을 다한 끝에 올A의 성적을 거두며 미국유학을 갈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성실한 태도가 지금의 그가 있게 한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청춘의 특권을 누려라


  마지막으로 그는 인생선배로서 대학생들에게 “높은 이상과 꿈을 가지고 많은 사람을 만나고 다양한 경험을 하는 것은 청춘의 특권”이라며 대학시기가 인생의 승패를 좌우하는 가장 큰 갈림길이므로 잘 보내라고 당부했다.


  “제가 대학에 다닐 때 ‘대학생은 꽃봉오리 같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 의미를 잘 몰랐습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니 대학생활이야말로 인생의 가장 큰 꽃봉오리입니다.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여러분들이 미래에 자신만의 꽃을 활짝 피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인터뷰를 시작할 때 ‘젊음의 풋풋함이 너무 부럽고 좋다’고 했던 그의 말이 떠올랐다. 확실한 목표를 향해 거침없이 돌진하는 대학생들에게 지지와 격려를 보내준 김장실 종무실장. 그의 지지와 격려와 함께 인터뷰를 마친 대학생기자단은 힘찬 발걸음으로 종무실을 나섰다.


박소영(서강대 국어국문학과)

한승린(동국대 광고홍보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