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선수도 ‘공부의 신’ 될 수 있을까?
게시일
2010.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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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빈

‘승부 지상주의’와 ‘엘리트 선수 양성’에 골몰해왔던 학원체육이 바뀌고 있다. 운동에만 올인해왔던 학생선수들이 비로소 학습권을 되찾게 됐고, 돈이 없어 운동을 포기해야 했던 아이들이 공짜로 각종 스포츠를 즐길 수 있게 됐다. 학교 현장에서는 스포츠만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스포츠 강사’도 등장했다. 지난 1~2년 새 벌어진 변화이다. 공감코리아 korea.kr은 우리 학원체육의 변화상을 총 6회에 걸쳐 조명한다. <편집자 주>


 6일 서울 종로구 계동 중앙고등학교 잔디구장에서 중앙고와 대동세무고 선수들이 경기를 벌이고 있다.
6일 서울 종로구 계동 중앙고등학교 잔디구장에서 중앙고와 대동세무고 선수들이 경기를 벌이고 있다. 
 

# 6일 서울 종로구 계동 중앙고등학교 잔디구장. 매년 3월 시작되는 ‘2010 전국고등리그’의 서울북부리그 개막전이 열리는 날이다. 계동에서 한 블록도 채 안 되는 거리에 자리 잡은 ‘중앙고’와 ‘대동세무고’가 첫 시합에서 맞붙었다.


개막전 경기인 데다 지역 라이벌 팀인 만큼 시작부터 양 팀의 기 싸움이 팽팽하다. 경기장 밖에선 각 학교 학생들과 선수가족, 학교관계자, 그리고 지역주민들이 한 데 모여 열띤 응원전으로 선수들 못지않은 기 싸움이 한창이다.


후반전 대동세무고의 엄명식 선수가 선제골을 뽑은 데 이어 중앙고의 미드필더 조영원 선수도 첫 골을 뽑는 데 성공. 치열한 경쟁 끝에 개막전은 결국 무승부로 끝났다. 승패를 넘어 경기 내내 선수들이 보여준 활발하고 투지 넘치는 플레이는 보는 이들에게 또 다른 즐거움을 선사했다.

텅 빈 객석과 썰렁한 반응으로 ‘그들만의 경기’에 머물러왔던 학원 축구가 바뀌고 있다. 객석은 색색의 풍선을 손에 든 학생들과 축구를 즐기려는 지역주민들로 채워졌고, ‘뛸 맛’ 나게 하는 푸른 잔디구장에선 주말마다 경기를 치르는 학생선수들의 몸놀림도 한결 가벼워졌다.


시행 2년째를 맞는 ‘초중고 주말리그제’가 도입 된 후 변화된 모습이다. ‘초중고 주말리그제’는 공부하는 운동선수 양성을 위해 문화체육관광부와 교육과학기술부, 축구협회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한 끝에 지난해부터 도입한 제도다.


‘PLAY! STUDY! ENJOY!’란 슬로건에서 알 수 있듯이, 즐기면서 운동도 하고 공부도 하자는 것이 주된 취지. 지난 수십 년간 진행돼 온 전국 토너먼트 대회 중심의 학원축구 시스템을 바꾸고, 특히 공부하는 축구선수를 양성해 한국 스포츠의 오랜 병폐를 깨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에 따라 지난해부터 학원축구는 학기 중 전국대회 개최가 완전히 폐지되고, 지역리그제와 연말 왕중왕전으로 치러지고 있다. 학생선수들은 평일 수업을 받고, 방과 후 오후에 훈련하며, 주말에 지역리그에 참가하면 된다.


이 날 첫 골을 기록한 대동세무고의 엄명식 선수는 “사실 지난해 갑자기 시행된 리그에 쉽게 적응하기 힘들었다”며, “공부와 운동을 병행하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올해는 공부도 운동도 더 열심히 해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고 싶다”고 다부진 각오를 밝혔다.


역시 첫 골을 넣은 중앙고의 조영원 선수는 “개인시간이 좀 줄어들어 아쉽기 하지만, 공부를 하면서 운동을 하니까 더 좋은 것 같다”며 “이번 시즌 서울북부리그 4위 안에 들어 왕중왕 전에 진출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 ‘승부 지상주의’ 부담 덜고 경기력 높아져


사실 그동안 운동선수 하면 수업도 빠지고 공부도 안 하며, 오로지 운동만 하는 학생들로 취급됐었다. 그도 그럴 것이 기존 전국대회가 열흘에서 보름간 집중적으로 열리다보니 경기에 ‘올인’하기 위한 합숙훈련, 전지훈련 등으로 수업은 뒷전일 수밖에 없었던 것.

특히 고교 선수들은 전국대회 4강 안에 들어야 대학에 진학할 수 있기 때문에 ‘즐기는 축구’가 아닌 ‘이기는 축구’로 변질돼왔다는 게 축구인들의 공통적인 지적이었다.

이런 폐해를 줄이기 위해 도입한 ‘주말리그제’는 권역별로 팀당 18∼30경기를 꾸준히 뛰면서 매주 한 경기씩 치르게 되므로 일단 선수들이 단기간 많은 경기를 치러야 하는 부담감을 덜었다.


특히 과거 전국대회에서는 예선탈락을 할 경우 6경기밖에 치르지 못해 실전경험을 쌓는 데 어려움이 있었지만 리그제가 도입되면서 모든 팀이 최소 18경기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에 경기경험이 축적돼 경기력 향상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중앙고 노영재 선수는 “리그제가 도입되면서 승부에 대한 압박감이 확실히 줄었다”며, “한두 경기를 지더라도 다음 기회가 있기 때문에 소극적인 패스보다는 좀 더 공격적이고, 능동적인 플레이를 하게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중앙고 이래창 감독은 “연간 경기 일정이 미리 나오기 때문에 상대편에 대한 맞춤전술과 기술축구가 가능해졌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라며, “부상선수도 2∼3주 후면 회복해 다시 경기에 나설 수 있기 때문에 선수 운용에도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 ‘공부하는 습관’ 생기게…사회 적응력 높인다


또 학기 중 전국대회 폐지로 파행수업의 폐해가 현저히 줄었다.어릴 때부터 대회 때문에 걸핏하면 1~2주씩 수업에 빠지는 것을 당연시 하던 전국 576개 초·중·고 축구부 학생들의 문화가 완전히 바뀌고 있는 것. 학부모 입장에서는 지방으로 다니면 비용 문제가 만만치 않은데, 지역 가까운 팀끼리 경기를 하게 돼 비용을 절감하는 효과도 있다.

대한축구협회 김종윤 과장은 “과거엔 학기 초인 3월부터 대회와 훈련에 참여해 심할 경우 1년 내내 수업에 거의 못 들어가는 경우도 있었다”며, “학업 성취도가 당장 향상되진 않겠지만 적어도 축구라는 좁을 울타리를 벗어나 선생님, 학생들과 어울릴 수 있게 돼 학생들의 인성과 사회성 향상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허정무 월드컵대표팀 감독은 끊임 없이 공부를 해야만 축구선수로 더 발전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는 “선수들도 ‘공부하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며, “모든 선수가 대표팀 유니폼을 입을 수 없고, 모든 선수가 프로팀에 들어갈 수 없는 만큼 공부를 통해 사회 적응력을 키워야 한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 지역 응원문화 생기고…일자리 창출도


경기가 비교적 시간적 여유가 많은 주말에 진행되면서 일반학생 및 선수가족, 지역주민들의 응원 문화도 점차 자리잡아가고 있다. 리그전이 동네에서 가까운 학교 구장에서 매주 개최되는 데다 지역 라이벌팀의 경기가 주민들의 흥미를 끌면서 자발적인 응원문화가 곳곳에서 생겨나고 있는 것.

과거 전국대회가 지방의 아무도 없는 데서 일반 학생들과 유리된 채 이루어지는 게임이었다면, 주말리그는 일반 학생이나 지역주민 모두 자발적으로 동참하면서 지역문화의 새로운 장을 열어가고 있다는 것이 관계자의 설명이다.

 리그제 개막 첫날인 6일. 중앙고 잔디구장 객석이 학생들과 지역주민들로 북적이고 있다.
리그제 개막 첫날인 6일. 중앙고 잔디구장 객석이 학생들과 지역주민들로 북적이고 있다. 

여기에 리그제 도입 후 축구 관련 일자리 창출도 연간 무려 2만7844명에 이른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심판이 2만1348명, 감독관 1780명, 운영요원 4716명 등이다. 리그제의 규모 확장이나 스포츠 마케팅 활성화에 따라서는 더 많은 일자리가 창출될 전망이다.

◇ 시범운영 1년 일단 합격점…타 종목 확산할 것


지난 1년간 리그제 시범 운영결과는 일단 합격점이다. 실제로 한국갤럽이 전국 623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만족도 조사결과에서 지도자 82%, 학부모 82%가 리그제 시행에 대체로 만족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대부분 처음 축구를 시작하는 초등생의 경우 리그제 시행 이후 변화가 두드러져, 52%가 수업 집중도가 긍정적으로 변했다고 생각했으며, 교우관계도 57%가 긍정적 변화를 체험한 것으로 조사됐다.


그러나 도입 초기인 만큼 개선해야 할 부분도 적지 않다. 장기적으로 ‘홈 앤 어웨이’ 방식으로 자리 잡아야 하는 만큼 인조 잔디구장, 야간 조명시설 같은 인프라 확충이 좀 더 요구된다.

 파이팅 사진
이에 따라 문화체육관광부와 교육과학기술부는 2012년까지 매년 200~300개교씩 총 1000개교에 천연잔디, 인조잔디, 우레탄 다목적구장 등을 조성하기로 했다. 이와 함께 학교운동장을 지역주민들에게 개방하고, 스프링클러, 야외 탈의실 등을 함께 설치해 학생은 물론 시민들이 보다 편리하게 활용하도록 할 방침이다.

정부는 또 리그제의 조속한 정착을 위해 앞으로 대통령기(배), 국무총리기(배), 문화체육관광부장관기(배) 등 정부명칭을 사용하는 전국 규모 경기대회 중 학생선수가 참여하는 대회는 내년부터 학기 중 개최를 전면 금지하고 휴일이나 방학기간 중에 개최하도록 한다는 계획이다.

대한축구협회 이원재 부장은 “아직은 과도기 단계에 있지만 아마도 지금의 초등학생들이 고등학교에 들어가는 시점이 되면 주말리그제가 정착돼 있을 것”이라며, 축구 관계자와 학생, 학부모들의 지속적인 관심을 당부했다.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주말리그제는 학원체육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혁신적인 프로그램”이라며, “지난해 시범 도입한 축구 종목이 비교적 성공적이었던 만큼 야구 같은 다른 종목으로도 꾸준히 확산해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문화체육관광부 홍보지원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