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에 홀리고 필름에 미치다
게시일
2010.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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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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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자
조수빈

제주에 가면 꼭 가보시라 권하는 데가 있다. 김영갑 사진 갤러리 ‘두모악’이다. 두모악은 김영갑의 개인 갤러리지만 갤러리에 김영갑은 없다. 김영갑은 5년 전에 죽었다.


김영갑은 죽어서 더 유명한 사람이다. 그는 제주에서 20년을 꼬박 살았다. 1985년 섬으로 들어와 2005년 섬에서 갔다. 그는 고집스레 제주의 속살을 필름에 담았다. 온몸의 근육이 말라가는 루게릭 병과 싸우며 그는 사진을 찍었고 폐교를 갤러리로 일궜다.


전생에 무슨 연이 닿았는지 나는 생전의 김영갑과 짧은 인연을 맺었다. 엉엉 울며 그의 부고 기사를 써야 했다. 고약하다면, 고약한 인연이다.


5월 29일은 섬에 홀려 필름에 미쳐 살다 간 사진작가 고(故) 김영갑(1957∼2005)의 5주기다. 생전의 김영갑이 사랑했던 제주 풍경 몇 가지를 전한다.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


성지가 된 갤러리. ‘두모악’은 한라산의 옛 이름이다. 2001년 루게릭 병 판정을 받은 김영갑이 2002년 성산읍 삼달리의 폐교를 장기 임대해 사진 갤러리로 개조하기 시작했다. 2005년 김영갑이 황망히 떠난 뒤 박훈일(41) 관장이 공사가 덜 끝난 두모악을 지금의 모습으로 만들었다. 갤러리 부지 면적은 13223.14㎡, 전시 공간은 991.74㎡. 20만 장이 넘는다는 김영갑의 작품 중에서 100여 점이 순환 전시되고 있으며, 옛 운동장은 제주 중산간 지역처럼 꾸며져 있다. 지난해 7만 명이 갤러리를 방문했다.



(상) 김영갑 사진 갤러리‘두모악’ 풍경. (하) 김영갑 사진 갤러리 ‘두모악’ 정원에 있는 돌 인형

(상) 김영갑 사진 갤러리‘두모악’ 풍경. (하) 김영갑 사진 갤러리 ‘두모악’ 정원에 있는 돌 인형. 생전의 김영갑을 형상화했다. 

 

제주 올레 3코스가 두모악을 통과한다.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은 “5월 현재 300㎞가 훨씬 넘는 올레 코스 중에서 유일하게 돈을 내고 들어가는 곳이 두모악”이라고 말했다. 갤러리 정문에서 왼쪽으로 5m쯤 옆에 벼락 맞은 감나무가 서 있다. 그 나무 아래 가루가 된 김영갑이 잠들어 있다. 생전의 김영갑을 기억하는 방문자가 담배 한 개비 불붙여 내려놓는 곳이다.

입장료 3000원. 064-784-9906. www.dumoak.co.kr.


# 오름


김영갑의 작품 세계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제주도에 정착한 초기, 그는 제주의 풍물을 담는데 주력했다. 해녀와 굿판이 김영갑 초기 작품에 자주 보이는 까닭이다. 90년대부터 그는 제주의 풍광에 빠져든다. 장소로 구분하면 크게 세 개를 들 수 있는데, 하나가 마라도다. 김영갑의 마라도 작업은 그의 첫 작품집 『마라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다음 장소라면 바다다. 그러나 김영갑의 바다는 푸르고 시원한 바다가 아니다. 비 맞고 눈 맞고 바람맞는, 심란한 바다다. 마지막 장소가 중산간이다. 돌담 쌓은 밀밭 사이 오름 삐죽이 서 있는 중산간에서 김영갑은 들판의 당근 씹어 먹으며 작업을 했다.


그가 유난히 사랑했던 오름이 있다. 용눈이오름. 용이 누워있는 모습처럼 생겼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김영갑이 가장 애정을 보였던 용눈이오름

김영갑이 가장 애정을 보였던 용눈이오름. 매끈한 곡선이 볼 때마다 다른 느낌을 준다.

  

용눈이오름의 매끈한 곡선과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딴판으로 보이는 모습이 김영갑의 눈길을 붙들었다. 배우 소지섭이 사진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카메라 CF가 있는데, 이 사진이 김영갑이 용눈이오름 근처에서 작업했던 작품이다. 용눈이오름은, 어느새 오름 트래킹의 대표 코스가 돼 버렸다. 이정표도 잘 돼 있고 탐방로도 새로 냈다.


지금 두모악은 야트막한 언덕 양쪽에 소나무가 한 그루씩 서 있는 작품을 여럿 전시하고 있다. 이 작품의 무대가 구름언덕이다.


 

김영갑이 자주 들렀던 작은 언덕배기

김영갑이 자주 들렀던 작은 언덕배기. 지금 ‘두모악’엔 구름언덕이 나오는 작품이 열점이나 있다.

 

 

원래 이름이 없었는데, 김영갑이 가고난 뒤 박 관장이 이름을 붙였다. 용눈이오름에서 8㎞쯤 떨어져 있다. 이 밖에도 다랑쉬오름ㆍ아끈다랑쉬ㆍ손자오름도 작품에서 자주 보이는데 모두 동제주 중산간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


# 추억과 인연


몸이 성했던 김영갑이 버릇처럼 찾았던 곳이 있다. 김영갑은 온종일 중산간에서 헤매다 비자림 입구까지 가서 자동판매기 커피를 마시곤 했다. 김영갑은 그 커피를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커피라고 불렀다. 지금도 비자림 입구 매점에 그 자판기가 있다. 김영갑이 가장 맛있는 돼지고기 집이라고 인정했던 곳은 표선면 가시리에 있는 나목도식당(064-787-1202)이다. 동네 할머니가 동네 사람 상대로 장사하는 허름한 식당이다. 하나 돼지고기는 마을에서 잡은 신선한 것이 올라온다. 삼겹살 7000원.


 

제주 정석항공관 근처에 숨어있는 삼나무길 사진

제주 정석항공관 근처에 숨어있는 삼나무길. 물론 김영갑의 흔적이 밴 곳이다.

 

생전의 김영갑이 고마운 후배라며 소개해준 사람이 있다. 2005년 조천읍 북촌리에 돌하르방공원을 연 김남흥(43) 원장이다. 두모악 정원에 있는 수많은 돌조각이 김 원장 작품이다. 김 원장 역시 "아픈 육신 돌보지 않고 갤러리 꾸리는 형님을 보고 힘을 얻었다"고 말한다. 직접 둘러보면, 여느 되바라진 관광지와 다르다는 걸 알 수 있다. 돌하르방의 원형을 가장 잘 구현한 공원이라는 평을 듣는다. 입장료 4000원. 064-782-0570, www.dolharbangpark.com.


글·사진/중앙일보 손민호 기자

출처/공감코리아(www.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