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그림 속으로 들어간다
게시일
2010.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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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빈

조선 최고의 유학자 퇴계 이황(1501~1570) 선생은 청량산을 유독 사랑했다. 성리학을 창시한 주자가 무이산을 각별하게 여긴 것처럼, ‘동방의 주자’인 퇴계에게 청량산은 이상향이나 다름없었다. 태어난 지 일곱 달 만에 아버지를 여읜 퇴계가 숙부 이우에게서 학문을 배우기 시작한 곳도 청량산 중턱의 청량정사였다.

낙엽 쌓인 오솔길을 지나는 퇴계 녀던길, 오른쪽으로 멀리 농암 종택이 보인다.
그리고 말년에 <도산십이곡>을 지은 곳도 청량산이었다. 퇴계의 영향을 받아 청량산을 둘러본 뒤 유람기나 시를 남긴 사람만도 백여 명에 이른다고 한다. 자신을 ‘청량산인’이라 칭한 퇴계는 <청량산가(淸凉山歌)>를 비롯해 여러 편의 시를 남기기도 했다.


청량산(淸凉山) 육육봉(六六峯·12봉우리)을 아는 이

나와 백구(白鷗·흰 기러기)

백구야 날 속이랴 못 믿을손 도화(桃花·복사꽃)로다

도화야 물 따라 가지 마라 어주자(漁舟子·어부) 알까 하노라


퇴계는 을사사화(1545년) 이후 모든 관직을 사퇴했다. 고향인 도산으로 낙향해 양진암(養眞庵)을 짓고 은거하는 동안에도 수차례나 조정의 부름을 받았다. 그래서 마지못해 단양군수나 풍기군수 같은 외딴 고을의 수령으로 잠시 관직을 맡은 적도 있다. 하지만 퇴계는 그것마저도 번잡스러워하며 50세 때 신병을 이유로 사직서를 제출한 뒤 회답도 기다리지 않은 채 낙향했다.


57세 때부터 5년에 걸쳐 도산서당을 지은 퇴계는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진력하는 가운데서도 수시로 청량산을 오르내렸다. 도도히 흐르는 낙동강 물길과 어깨동무하며 걷던 퇴계 오솔길은 사색의 길이자 환상의 길이었다. 퇴계는 그림처럼 아름다운 그 길을 걸을 때마다 자신이 ‘그림 속으로 들어간다’고 표현했다.

농암 종택 앞 낙동강변의 해질녘.
퇴계·이육사·이현보… 문인들의 옛 정취 물씬


‘퇴계 녀던길(옛길)’이라고도 불리는 퇴계 오솔길은 현재 경북 안동시 도산면 단천리 면천마을의 청량산전망대에서 가송리 농암 종택까지 3킬로미터가량 이어진다. 누구나 2시간 안팎이면 왕복할 수 있을 만큼 평탄하고 짧아서 본격적인 걷기 여행코스로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럴 경우에는 살아생전의 퇴계가 도산서당을 세워 후진 양성에 힘썼고, 사후에는 퇴계의 위패를 모시고 향사(享祀)를 지내는 도산서원에서 출발하는 것이 좋다.

퇴게 이황을 모신 도산서원. 바로 앞의 건물이 퇴계가 5년에 걸쳐 완성한 도산서당이다.

도산서원에서 퇴계 종택과 퇴계 묘소를 거쳐 녀던길 시점(始點)인 청량산전망대까지의 거리는 6.2킬로미터. 딱딱한 아스팔트 도로를 걸어야 한다는 게 약간 불편하지만, 퇴계의 유적지를 고스란히 더듬으며 퇴계 녀던길의 의미와 가치를 가슴으로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한번 시도해볼 만하다. 하지만 도산서원에서 퇴계 종택 사이 약 1.3킬로미터에 이르는 고갯길을 걸어서 넘기가 부담스러우면, 하루 네 차례 운행하는 시내버스나 도산면 개인택시를 이용해도 된다.


도산서원에서 넘어온 고갯길이 끝나는 토계교를 건너 오른쪽 길로 5백 미터쯤 가면 퇴계 종택에 도착한다. 원래 도산면 온혜리의 노송정 고택에서 태어난 퇴계는 그곳에서 십 리쯤 떨어진 토계리 상계동에 분가해 살았다. 하지만 오늘날의 퇴계 종택은 20세기 초에 13대 종손이 다시 지은 것이다.


퇴계 종택에서 다시 1.5킬로미터쯤 길을 더 가면 퇴계 묘소와 양진암 옛터가 있는 하계동에 이른다. 퇴계는 46세 때 양진암을 짓고 성리학 연구에 전념했다. 현재 양진암 옛터에는 ‘養眞庵舊址(양진암구지)’라는 작은 빗돌만 덩그러니 서 있다. 퇴계 묘소는 양진암 터의 옆으로 난 계단길의 꼭대기에 자리 잡고 있다. 퇴계의 명성에 비해 묘소는 의외로 소박하다. 묘 옆의 조촐한 비석에는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만년에 도산으로 물러나 은거했던 진성 이 공의 묘)’라는 글씨와 함께 퇴계가 손수 지었다는 간략한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다.

도산면 원천리의 마을 어귀에 자리 잡은 이육사문학관.
하계동에서 야트막한 고갯길을 넘으면 도산면 원천리의 이육사문학관에 당도한다. <청포도> <광야> 등으로 유명한 항일시인 이육사(1904~1944)는 퇴계의 14대손이다. 육사의 여섯 형제가 태어난 육우당은 안동댐 건설로 안동시 태화동의 민속촌으로 옮겨졌다. 집터에는 육사의 시비(詩碑)와 빗돌만 남아 있고, 이육사문학관 뒤뜰에는 육우당의 복제건물이 들어서 있다.


이육사문학관에서 1.8킬로미터 거리의 단천교 삼거리로 가는 길에서는 낙동강이 아스라하다. 강은 멀고 길은 딱딱해서 약간 지루하게 느껴지는 구간이다. 녀던길은 단천교 삼거리에서 곧장 강을 따라간다. 하지만 단천교 앞에서 청량산전망대까지 낙동강 물길을 옆구리에 끼고 이어지는 1.7킬로미터의 강변길은 ‘무늬만 황톳길’이다. 콘크리트 포장도로에 페인트칠을 해놓았다. 길가 경계석에 걸터앉았다가는 황토색 페인트 가루가 묻어나기 일쑤다.


청량산전망대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사람들의 넋을 빼놓을 정도로 아름답다. 천삼백 리의 낙동강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들 만큼 조망이 탁월하고 풍광이 수려하다. 유장하게 흐르는 낙동강 물길 위로 학소대 암벽이 우뚝하고, 다시 그 뒤로는 하늘과 맞닿은 청량산 연봉의 실루엣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해발 8백 미터대의 청량산 선학봉과 자란봉 사이를 잇는 하늘다리까지도 또렷하다.


한 폭 수묵화 같은 설경… 독특한 운치 흠뻑


청량산 원경(遠景)뿐만 아니라 전망대 바로 아래의 강변 풍경도 그림처럼 아름답다. 왼쪽 산기슭에는 주인 잃은 농가 두어 채가 자리하고, 억새와 갈대 우거진 강둑에는 조붓한 퇴계 녀던길이 실낱처럼 드리워져 있다. 이곳을 찾은 이들은 누구나 ‘그림 속으로 들어간다’는 퇴계의 수사가 하나도 틀리지 않았음을 저절로 깨닫게 마련이다.

그러나 전망대 아래의 강변으로 이어지는 퇴계 녀던길은 무시로 폐쇄되기도 한다. 녀던길이 지나는 한 사유지의 주인이 사람들의 통행을 금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동시청에서는 산자락으로 돌아가는 우회로를 개설해놓았다. 하지만 강변길의 독특한 운치를 포기할 수 없는 나그네들은 땅주인의 눈을 피해 강변길로 내려선다.

청량산전망대와 농암 종택 사이의 퇴계 녀던길 중간에 있는 공룡발자국 화석.
전망대에서 가파른 비탈길을 내려서면 평지다. 말라버린 잡초와 억새 사이로 녀던길은 길게 이어진다. 강변길의 정취가 다채롭다. 둑길도 지나고 자갈길도 만난다. 공룡발자국 화석도 발견되고, 퇴계의 시를 새긴 시비도 눈에 띈다. 길의 정취에 취해 무심코 걷다 보니 농암 종택이 지척이다. 입춘조차 지난 늦겨울인데도 길에는 아직 낙엽이 수북하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서걱거리는 낙엽 소리와 여울을 타넘는 물소리가 듣기 좋다.


퇴계 녀던길 종점에는 농암 종택이 있다. 조선시대 대표적 문인 중 한 명으로 <어부가> <농암가> 등을 지은 농암 이현보(1467~1555)의 후손이 지금도 산다. 농암의 원래 집터는 안동댐 건설로 물속에 잠기는 바람에 후손이 지금의 자리로 집을 옮겨왔다. 주변 풍광이 아름답고 고택의 예스런 멋도 일품이어서 안동을 대표하는 고택 민박집으로 손꼽힌다. 농암 종택이 자리한 도산면 가송리에는 고산정이라는 옛 정자도 있다. 낙동강변의 기암절벽 아래에 자리 잡은 고산정은 풍광이 빼어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


현재 퇴계 녀던길의 종점은 농암 종택이지만 옛날에는 청량산이었다. 농암 종택에서 낙동강 물길을 거슬러 5킬로미터쯤 더 가면 청량산 입구의 청량교에 도착한다. 도중에 고산정 앞을 지나기도 한다. 소싯적의 퇴계가 숙부에게 <논어>를 배우던 곳은 청량산 오산당이었다. 퇴계가 세상을 떠난 뒤에 후손과 영남의 유학자들이 그를 기리기 위해 오산당 터에 집을 다시 짓고 청량정사라 이름 붙였다.


청량정사로 가려면 청량사 아래의 선학정에서 곧장 오르는 길이 지름길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응진전을 거쳐 가는 길이 훨씬 더 좋다. 숨이 턱 멎을 만큼 뛰어난 전망과 아찔한 전율을 맛볼 수 있다. 특히 오색단풍이 현란한 가을 풍경과 한 폭의 산수화 같은 겨울철 설경이 오래도록 가슴에 남는다.


여행 정보


숙박

되도록 농암 종택(054-843-1202)에서 하룻밤 묵는 것이 좋다. 종택 앞의 강변 풍경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퇴계 녀던길의 종점에 위치해 있어 이용하기도 편리하다. 수세식 화장실과 온수가 공급되는 세면장도 있고, 원할 경우에는 식사(1인당 6천원)도 제공된다. 청량산 어귀의 상가지구에는 청량산모텔(054-674-2267), 하늘정원펜션(054-674-2552), 황토방민박(054-673-9777) 등이 있고, 청량산 내에는 청량산폭포민박(054-672-1488), 들꽃피는펜션(054-672-1475), 판타지아 청량정(010-3303-0323) 등의 숙박시설이 있다.


맛집

도산면사무소 부근의 몽실식당(054-856-4188)은 소박하면서도 맛깔스러운 가정식 백반을 차려주는 집이다. 특히 콩잎장아찌, 우거지된장국, 명태코다리찜 등의 토속적인 반찬이 감칠맛을 더한다. 청량산 어귀에는 까치소리식당(간고등어정식, 054-673-9777), 나분들식당(손두부전골, 054-673-5450), 청량산식당(산채정식, 054-673-2560), 하늘정원식당(민물매운탕, 054-674-2552) 등의 음식점이 있다.


가는 길

승용차│중앙고속도로 서안동IC(34번 국도, 안동 방면)→안동시내 천리교 북단(좌회전, 35번 국도)→도산서원 삼거리(우회전)→도산서원 주차장

대중교통│안동시외버스터미널 옆 교보생명 앞에서 도산서원행 67번 시내버스가 하루 5회 출발한다. 매시 출발하는 도산면소재지(온혜리)행 시내버스를 타고 가서 다시 택시(도산 개인택시 054-856-1031, 1056, 1256)를 이용해도 된다. 온혜리에서 도산서원까지는 5천원 선.


글·사진:위클리공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