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쿠버서 ‘국가대표’의 감동을 다시한번
게시일
2010.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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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빈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놓쳐서는 안 될 이름들이 있다. ‘비인기 종목’이란 이름으로 빛에 가려진 선수들. 가슴에 태극기를 달고 묵묵하게 누구보다 굵은 땀방울을 흘려온 밴쿠버의 ‘숨은 영웅’들을 모아봤다.

 

스키점프 국가대표 김현기 선수가 멋지게 날고 있다. 김 선수를 비롯한 스키점프 대표팀은 지난해 영화 <국가대표>로 알려지기 전까지 아르바이트로 훈련 및 경기 참가 비용을 댔다.

스키점프 최흥철·최용직·김현기
출전 쿼터 줄어 개인전만 출전

 

지난해 대한민국은 영화 <국가대표>에 열광했다. 실제 스키점프 국가대표들의 사연을 바탕으로 만든 이 영화는 이름조차 생소한 종목의 선수들이 꿈을 위해 어떤 시련을 이겨내왔는지 유쾌하면서도 감동적으로 조명했다. 덕분에 최흥철(29), 최용직(28), 김현기(27), 강칠구(26)는 오랜 무명의 시간을 끝내고 ‘하이원’이라는 안정된 소속팀을 찾게 됐다. 그리고 그 둥지는 밴쿠버로 향하는 이들의 어깨에 작은 날개를 달아줬다.


이들 넷이 처음 모인 건 1993년이다. 1997년 무주 유니버시아드대회를 준비하기 위해 무주 주변 스키 유망주들 가운데 스키점프 멤버를 선발했는데 이들이 눈에 띈 것이다. 그때만 해도 스키점프가 어떤 종목인지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선수들은 유니버시아드대회와 동계올림픽 유치를 앞둔 전라북도의 지원 아래 빠르게 기량을 쌓았고, 해외 전지훈련을 거치면서 유소년 신기록을 세우는 등 가능성을 보였다.


문제는 18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상황이 크게 달라진 게 없다는 점이다. 반짝 지원은 금세 끊겼고, 국내 스키점프 저변은 너무 좁았다. 선수들은 아르바이트로 비용을 충당해가며 훈련하고 경기했다. 대표팀을 보좌하는 스태프는 김흥수(30) 코치 한 명뿐. 왁스 트레이너까지 따로 둔 외국 선수들은 첫 번째 점프를 마친 후 심리 트레이너와 함께 명상하며 두 번째 점프를 준비했지만, 우리 선수들은 직접 스키에 왁싱을 하는 동시에 마인드 컨트롤까지 알아서 해야 했다.


그러니 우리 스키점프 팀이 거둔 성과는 ‘기적’에 가깝다. 2003 타르비시오 동계유니버시아드 개인·단체전 금메달, 2003 아오모리 동계아시안게임 단체전 금메달, 2007 토리노 동계유니버시아드 개인·단체전 은메달. 지난해에도 하얼빈 동계유니버시아드대회에서 개인전과 단체전 금메달을 휩쓸었다. 또 국제스키연맹(FIS)컵 대회에서 최흥철, 김현기가 번갈아 1위에 오르는 등 꾸준히 성적을 냈다.


영화 흥행 성공에 힘입어 소속팀이 생긴 이들은 좀 더 안정된 환경에서 훈련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됐다. 해외 전지훈련에도 많은 시간을 투자하면서 올림픽을 준비했다. 하지만 하루아침에 갑자기 세계적인 수준으로 도약할 수는 없다. 선수들의 노력과 열정만으로 넘어서기엔 현실의 벽이 너무 높기 때문이다.


특히 올림픽 출전 쿼터가 3장으로 제한되면서 강칠구가 엔트리에서 빠진 게 아쉽다. 4명이 나서는 단체전 출전이 무산됐기 때문이다. 게다가 쏟아지는 국민적 관심이 오히려 부담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스키점프 관계자들은 “개인전에서는 20위 안에만 들어도 훌륭한 성적인데, 자칫 국민들 기대가 커서 실망할까 두렵다”고도 한다.


그래도 한 가지는 분명하다. 밴쿠버 하늘로 날아오르는 이들의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도 국민들에게 짜릿한 감동을 안겨주기에 충분하다는 것. 올림픽은 시상대에 오르는 선수들만의 것이 아니지 않은가.


봅슬레이 강광배

17년간 썰매 세 종목 모두 올림픽 출전


강광배(38)가 처음 설원의 매력에 빠진 건 대학 새내기 시절 무주리조트 스키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였다. 하지만 밤낮으로 스키에만 매달려 살던 1995년, 슬로프를 내려오다 무릎 십자인대가 파열되는 사고를 당했다. 곧바로 지체장애자 5급 판정이 떨어졌다.


더는 스키를 탈 수 없다는 선고에 좌절하던 그는 운명처럼 대학 게시판에서 루지 선수를 선발한다는 공고를 발견했다. 일말의 주저도 없이 곧장 지원했고, 30명 중 2등으로 뽑혀 정식 선수가 됐다. 여름이면 바퀴를 단 썰매를 타고 아스팔트를 질주하길 수차례. 결국 1998년 나가노 동계올림픽에 루지 국가대표로 출전하면서 첫 태극마크를 달았다.


나가노 동계올림픽 이후에는 동계스포츠의 본고장인 오스트리아로 유학을 떠났다. 하지만 또다시 시련이 닥쳤다. '세대교체’를 이유로 대한루지연맹으로부터 대표 자격을 박탈당했고, 무릎을 또 다쳐 수술대에 올랐다.

 

봅슬레이 대표팀은 벤쿠버 동계올림픽 4인승과 2인승 종목에 출전한다.

 

대학 지도교수 소개로 스켈레톤을 접하지 않았더라면 그와 동계올림픽의 인연은 그대로 끝났을지도 모른다. 스켈레톤에서 희망을 찾은 그는 혼자 대한봅슬레이·스켈레톤연맹을 만들어 국제봅슬레이·스켈레톤연맹에 가입하는 열정을 발휘했다. 그리고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대회와 2006년 토리노 대회에 스켈레톤 선수로 출전하고야 말았다.


그의 도전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국내 미개척 종목이었던 봅슬레이를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기적적으로 일본을 따돌리고 밴쿠버행 티켓을 거머쥐는 데 성공했다. 처음 루지를 시작한 이후 17년 만에 썰매 세 종목으로 모두 올림픽에 출전하는 업적을 이룬 셈이다. 비록 메달권을 바라보기는 어렵지만, 강광배야말로 한국 동계스포츠의 ‘개척자’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다.


바이애슬론 문지희

밴쿠버에서 경험 쌓고 소치에서 금메달 노려


문지희(22·전남체육회)는 한국 바이애슬론의 현재와 미래를 상징하는 선수다. 무주중학교 스키부에서 처음 바이애슬론과 인연을 맺은 뒤 2005년부터 5년째 태극마크를 달고 설원을 누비고 있다. 서양 선수들에 뒤지지 않는 신체조건을 갖춘 데다 승부욕도 강해 처음부터 남다른 주목을 받았다.


본격적으로 재능을 꽃피운 건 무릎 부상에서 벗어난 2007년. 국제무대에 발을 내디딘 지 1년 여 만에 월드컵 37위까지 도약했다. 당연히 한국 바이애슬론 사상 최고 기록이다.


문지희의 꿈은 국제무대에서 메달을 따내는 것이다. 사실 당장은 어렵다. 아직 기술적으로 완성돼 있지 않고, 경기운영 능력을 더 길러야 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경기 후반의 질주를 위해 상체 근력도 키워야 한다.


하지만 밴쿠버는 문지희가 성장하는 과정의 하나다. 4년 후 소치에서는 더 큰 열매를 맺게 될지 모른다. 2년 정도만 더 상승세를 유지한다면 세계 대회 15위권까지 바라볼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적인 견해다.


크로스컨트리 이채원

이름 석자가 역사… 동계체전 최다 금메달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채원(29)의 이름 석자는 곧 ‘한국 크로스컨트리’와 동의어였다. 중학교 1학년 때 교내 스키부에서 처음으로 크로스컨트리와 인연을 맺은 뒤 2학년이던 1996년 동계체전에 첫 출전해 여자부 프리 종목에서 은메달을 따냈다. 이후 14년째 간판스타다. 국내에서는 누구도 넘보기 힘든 기록을 쌓아왔다. 이전까지 14차례의 동계체전에서 따낸 금메달만 어느덧 41개. 이달 열린 동계체전에서도 메달 행진을 이어가면서 알파인스키 허승욱이 갖고 있던 역대 최다 금메달 기록(43개)을 넘어섰다.


물론 이채원도 세계 수준과는 아직 격차가 있다. 현재 FIS 랭킹은 2백60위. 사상 최고 성적도 2006~2007 시즌의 1백31위였다. 하지만 ‘스키의 마라톤’이라고 불릴 정도로 힘든 종목에서 척박한 현실을 뚫고 일궈낸 성과라 의미가 있다. 30대를 바라보는 나이에도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도전을 멈추지 않는 점도 그렇다.


1백54센티미터의 키에 48킬로그램인 여린 몸매로 거구의 북유럽 선수들과 겨뤄온 이채원. 밴쿠버 설원에서 펼쳐질 그녀의 질주는 ‘올림픽 정신’의 상징이 될 듯하다.

 

한국 스노보드 선수로는 처음으로 올림픽에 출전하는 김호준이 멋진 공중 곡예를 선보이고 있다(위). 이채원 선수는 척박한 현싫을 뚫고 '스키의 마라톤'이라고 불리는 크로스컨트리에 출전한다(아래).
스노보드 김호준
사상 첫 하프파이프 출전 ‘의지의 사나이’

 

김호준(20·한국체대)은 국내 스노보드 사상 처음으로 하프파이프에 출전한다. 출전만이 한국 ‘최초’는 아니다. 지난해 2월 2009 동계유니버시아드대회에서 따낸 은메달은 역대 동계 유니버시아드대회에서 한국이 처음으로 거머쥔 메달이었다.


이제 약관의 나이지만 김호준의 선수 경력은 벌써 11년째다. 스키장비점을 운영하던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눈과 친해진 게 계기였고, 스노보드 전향 후 첫 전국 대회이던 1999년 2월 전국스키선수권대회에서는 하프파이프와 대회전에서 준우승하고 보드크로스에서 동메달을 따내 재능을 인정받았다.


중학교 2학년 때 발목 인대가 끊어지는 부상으로 1년 넘게 재활에 매달리는 시련도 겪었다. 겨울에만 스키장을 개장하는 국내 사정 때문에 엄청난 전지훈련 비용을 감수하면서 선수생활을 이어왔다. 하지만 오뚝이처럼 일어나 각종 주니어와 시니어 국제대회에서 꾸준히 성적을 내온 ‘의지의 사나이’다. 밴쿠버에서도 험난한 경쟁이 불 보듯 뻔하지만 기죽지 않고 제 기량을 보여주겠다는 게 그의 목표다.


스키 서정화

밴쿠버 6위 입상 목표… 한국 스키 새 역사 쓸 것


서정화(20·미국 남캘리포니아대)는 학업과 운동을 병행하면서도 지난해 9월 미국의 명문 남캘리포니아대학(USC)에 입학해 화제를 모았다. 이후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는 의미로 ‘알파걸’이라 불리기 시작했다. 학업뿐만 아니라 운동에서도 성공을 눈앞에 두고 있어서다.


지난해 3월 세계선수권대회에서 한국 선수로는 처음으로 30위권에 진입해 일찌감치 올림픽 출전권을 따낸 게 그 증거다. 또 수험생 신분에서 벗어나면서 성적도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다.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의 목표도 6, 7위 정도로 높게 잡았다. 대표팀 관계자들은 “날씨만 도와준다면 그 이상의 성적도 나올 수 있다”고 내심 기대하고 있다.


게다가 서정화에게 이번 올림픽은 새 역사를 위한 출발지점일 뿐이다.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에서는 스키 종목 사상 처음으로 금메달까지 바라보고 있다. 세계적인 선수들은 30살을 전후해 전성기를 맞는데, 서정화는 이제 갓 스무 살인 데다 매일같이 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글·사진:위클리공감